아마도 자신들도 간절히 원하지만 하지 못하고 있는 퇴사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잘 지내고 있기에 하는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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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누구와 다를 바 없이 4학년 마지막 학기, 취업을 위한 준비를 했다. 소설에 가까운 자소서를 쓰고, 원치도 않는 직장생활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는 척해야만 했다. 그 외에는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남들 하듯이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직장 생활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30대 대기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갖고 있는 학벌이나 남들 하는 건 다 따라 했던 덕에 어찌어찌 괜찮은 직장에 괜찮은 연봉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첫 6개월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회사에서 인정하는 적응기간 혹은 교육기간. 중책은 주어지지 않으면서 상당한 월급을 받았고 처음 가져보는 완전한 경제적 자유라는 느낌에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연차가 쌓이고, 회사에서 내게 원하는 것이 많아지고, 중요한 직책을 맡아가며 스트레스는 점점 늘어났다.
회계팀에 있었던 나는 매월 정기 대금이 나가는 날에 대금지불 사고가 나는 악몽으로 새벽에 잠에서 깨곤 했고 진짜로 지급사고라도 나면 관련자 모두가 일주일간 야근을 해야만 했다. 또 윗사람이 바뀌면 그에 적응하느라 위장염, 한 번은 위궤양으로 한 달 내내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나 또한 여느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만 궁리했다.
가죽공방에 다니면서 가방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체육교사가 되어볼까 학교를 알아보기도 하는 등 직장생활을 끝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물색하는 한편 클라이밍, 자전거, 필라테스 등 내가 좋아하던 운동들을 하며 퇴근 후의 삶을 최대한 즐기려 노력했다.
사건의 발생.
때는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던 바로 직전 연도 12월이었다. 국가는 특정 회사에 대해 5년마다 세무조사를 실시할 수 있는데 이전 세무조사로부터 정확히 5년이 지났고 내가 입사한 지는 4년이 지난 시점.
12월 6일 내 생일에 약 두 달간 만난 사람에게 사전 예고도 없이 이별통보를 받았고 자존감 따위 없던 시절이라 엄청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4일 뒤인 12월 10일 오전 9시, 출근 한 시간가량 지난 때에 같은 팀 동기 하나가 내 등을 툭툭 쳤다.
"민정아, 공지 좀 봐라."
심각한 얼굴로 나한테 다가온 동기는 아무 말 없이 내가 공지를 열어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길래 저래.'
[직원 본인상]
사인: 심장마비
그리고 고인의 이름엔 같은 층에 근무하고 동기중 그래도 가장 가깝게 지내던 동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인: 김솔인(가명)
솔인과는 회사 밖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같은 층으로 배정된 이후 매주 수요일마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개인적인 일도 서로 털어놓는 사이었다. 그런데 본인상이라니.
고인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심장마비라는 사인은 나에게 suisidal, 즉 자살을 의미하는 단어였고 그렇게 밝고 예쁘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날 내게 머리를 했다며 신나게 자랑하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손에는 땀이 흥건하고 심장은 내 눈의 초점을 흔들 만큼 강하게 쿵쾅거린다. 주변에 쉽게 흔들리고 자아가 명확지 않던 당시의 나에게 친구의 죽음이란 내 존재감 자체를 뒤흔들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그 길로 나는 일주일 휴가를 내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혔다.
결심.
너무나도 꽃다운 나이에, 누가 봐도 부족할 것 없이 자랐을 것 같은 맑고 예쁜 친구가 하루아침에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일이 나한테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
우울증을 오래 앓았던 어머니를 둔 나는 심리적인 병으로 삶을 포기하는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나니 그저 길가면서 흔히 보는 '졸음운전은 살인운전' 정도의 푯말을 보는 느낌이 아닌 큰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처럼 두 번째 삶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는 것부터가 힘들어 감정을 글로 옮기려니쉽지 않다.
그 이후로 나는 결심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기로. 그 일에 직장을 다니는 일도 포함되었다. 일을 하며 꿈을 이루고 행복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아닌 나를 한 발씩 불행으로 몰아넣는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듬해, 모두가 세무조사 준비로 바쁜 때 이기적이지만 나는 퇴사를 선언했다. 필라테스 강사가 되겠다며.
핑계는 아니었다.유명하다는 협회를 알아보고 수업을 이미 등록할 정도였으니 그때 당시 내가 가진 가장 현실적이고도 행복에 가까운 옵션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하시는 어머니는 나이 들어서도 센터를 운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지지하셨고 어려서부터 항상 달리기 1등, 체력장 전체 1등급을 놓치지 않을 만큼 운동신경이 있던 나는 잘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중에서 제일 잘하는 게 운동과 공부였는데 그 두 가지를 합친 게 필라테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로 결정하고 밀고 나갔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필라테스 강사가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지냈지만 실행에 옮길 계기나 용기가 부족했을 뿐. 동기 솔이의 죽음은 내게 충분한 용기와 계기를 주었다.
지금은 행복해?
응, 매우.
어떻게 필라테스 강사가 될 생각을 했냐는 질문 뒤에 따라오는 질문이다. 회사생활과 비교하면 어떻냐고. 돈 적당히 잘 벌고 사람들과도 잘 맞고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내가 운이 좋았던 걸까?
사람들은 늘 내게 말한다. 너같이 재주가 좋은 사람이나 그런 거 하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내세울만한 재주가 하나씩은 있다고 믿고 그것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그걸로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전제는 모두가 생각하는 '안정적인' 월급을 포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