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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듕쌤 Jun 26. 2023

행복을 주체할 수 없던 어느 화요일

가난한 자유를 얻어보기로 했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가장 기분이 좋을 땐 

'남들 일할 때 노는 것'이 아닐까?


때론 남들 노는 휴일에 일을 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남들보다 일하는 시간이 훨씬 적은 편이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8-9시간 풀로 일하고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돈을 벌 수도 있겠다만, 가난한 자유를 얻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절대 내 행복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일을 늘리지 않는다.




최근 감기에 걸리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일주일정도? 새벽 3시~5시에 잠들기를 반복하며 몸은 점점 피곤해졌지만 이상하게 잠이 도통 오지 않았다.


그렇게 피곤에 절어있었지만 다행히 일이 많이 없는 기간이라 하루 2-3개의 수업만 해내면 된다는 마음이 한없이 무거운 내 몸을 일으켰다.


어느 화요일.


우연히 오후 수업이 모두 오전으로 옮겨지고 1시에 퇴근을 했다. 감기기운은 조금 남아있었지만 이전보다 한결 나아진 느낌이었다.


남들 한창 점심 먹고 다시 일 시작하는 시간에 나는 집에 돌아와 버섯 샤부샤부를 끓이기 시작했다.


최근 신랑의 신장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경계 수준에 이르면서 채식 비율을 확 늘렸는데 그중에서도 버섯은 가격도 저렴하면서 씹는 식감도 탁월하고 단백질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 훌륭한 식재료였다.


물을 끓이며 샤부샤부 소스를 넣고 미리 잘라 냉동해 둔 무, 애호박, 양파를 끓여 밑 국물을 만든다.

물이 팔팔 끓으면 팽이버섯,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등을 투하한다.

마지막으로 마늘 한 스푼 가득과 생강 살짝 넣은  멸치가루를 넣어주면 끝.


국이 끓을 동안 곁들여먹을 오이, 셀러리를 씻고 잘라 준비하고 채소를 찍어먹을 치즈소스에 마요네즈, 그리고 쿠팡에서 천 원에 구입한 손바닥만큼의 허브 딜(dill, 오이 비슷한 향이 나는 특이한 허브)을 아주 조금씩 떼어내 넣는다.


원래 셀러리의 향을 정말 싫어했는데 캐나다에서 윙에 늘 셀러리가 곁들여 나오는 걸 보고 먹어봤다가 이 셀러리+딜 소스 조합에 꽂혀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어제 만들어 둔 닭갈비를 아주 조금 덜어 전자레인지에 데운 뒤 무쌈과 직접 만든 무채김치를 접시에 세팅하면 끝!


혼자 먹는데도 정말 한 상 제대로 차려내고 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기무라타쿠야의 드라마 'HERO'를 틀어놓고 식사를 시작한다.


혼쯔유 소스에 버섯을 살짝 찍어 먹으니 부드러우면서도 향긋하고, 오독오독 씹히는데도 포로록-하고 입 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최고다.


어제 미리 만들어놓아 차가워진, 가스파초 맛을 표방한 토마토+셀러리 수프까지 한입 먹으면 내 취향을 저격한 이 환상적인 맛에 감탄이 나온다.


"하~ 진짜 너무 맛있다."


직접 요리를 해 먹는 것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리라. 내가 먹고 싶은 향을 재연해 낼 수만 있다면 세상 어떤 비싼 요리도 부럽지 않다.


그리고 닭갈비에 고추장과 고추냉이를 살짝 얹어 무쌈에 돌돌 말아 한입에 쏙 넣으면 그 촉촉한 무쌈의 즙과 새콤함 뒤에 닭갈비의 매콤하고 쫄깃한 맛이 따라오면서 뭔가 부족한 식감과 포만감을 완성시켜 준다.


입이 심심할 땐 오이나 셀러리를  소스에 푹 찍어 소스를 먹는 건지 채소를 먹는 건지 싶을 만큼 반반 즐기다 보면 어느새 식탁에 차려둔 음식이 순식간에 사라져 있다.


포만감은 가득하면서도 위장이 부대끼지 않으니 그대로 소파에 가서 비스듬히 앉아 남은 드라마를 마저 본다.


배는 부르고 행복한 맛들이 여전히 콧 속에 머물러있고 손에서는 셀러리 향이 은은하게 나는 완전한 상태에 취해 어느새 스르륵 잠에 든다.




짹-짹


부웅-


열어둔 창문 밖으로 이런저런 소리들이 흘러들어온다.


"후아암... 몇 시지..?"


슬금슬금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있다. 오랜만에 정말 편안한 단잠이라 잠에서 깼는데도 불쾌하거나 힘들지 않다.


눈을 뜨니 아까 켜놨던 드라마가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빵을 먹고 있는데 아아 왜 이리도 맛있어 보이는 걸까.


노오란 가루가 송송 얹어진 고구마 생크림 빵.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잖아.


신랑과 통화를 하며 나갈 채비를 한다.


"응~나 잠깐 잤어~ 빵이 갑자기 너무 먹고 싶어서 뚜레쥬르 갈라구."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에코백을 하나 들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지만 올 땐 가득 채워오리라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시간은 이미 6시 반. 직장인들이 퇴근해서 들어오는 중인 것 같았다. 같은 건물 주민들이 퇴근해 돌아오는 걸 보고 "안녕하세요!"라며 힘차게 인사했는데 나인줄 못 알아봤나.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발걸음을 옮긴다.


6월 초,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 비가 며칠 내린 뒤 맑은 하늘엔 하얗고 푸른 구름들이 뭉게뭉게 떠있었다.


"하~ 기분이 너무 좋다아~"


남들은 퇴근할 이 시간에 나는 이미 한차례 밥도 거나하게 챙겨 먹고 낮잠도 잤으며 지금은 간식으로 먹을 빵을 사러 가는 중이다.


이런 삶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함이 느껴지며 발이 나도 모르게 통, 통 튀어올라 마치 어린아이가 신나는 발걸음으로 한 손엔 신발주머니, 등에는 책가방을 맨 채로 집에 돌아가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행복감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 깔깔대고 웃다가도 집에 돌아올 땐 늘 지치고 마음이 무거웠다. 약속을 가는 중에도 이렇게 들뜬 적이 없었고 데이트를 하면서도 이런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은 충만한 느낌. 왠지 모르게 눈이 촉촉해지는 것만 같아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다시 경쾌한 발걸음을 옮겨본다.


날씨가 좋은 6월의 어느 화요일, 누구를 만나는 것도 아니면서 혼자 빵을 사러 가는 이 길이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아직도 회사 다니면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이불킥 하며 잠에서 깨기도 하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징징대며 신랑한테 속상함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직업을 바꾸며 그 상황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과거의 일 때문에 힘들어하기는 해도 그런 이불킥 상황들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완전한 행복.


세상에 완전한 게 존재하기는 할까?


하지만 범위를 좁혀서, 지금 이 순간에 한정한다면 완전한 행복도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의 오늘이 그랬으니까.






'나의 이 행복감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나눠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지금 나의 행복한 마음과 과거의 이야기들을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정작 진짜로 우울한 사람들에겐 단순히 질투를 유발하는 자랑이 되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예전이 그랬으니까.


남들은 그저 부모를 잘 타고나서, 편하게 사는 줄만 알았다. 부잣집 아이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자라왔는지는 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나의 고통만 끌어안고 살았었다.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 우울한 거라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으니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그래도 '행복'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


대학시절엔 [행복의 과학]이라는 수업을 들었으며 회사를 다니면서는 [꾸뻬씨의 행복 여행]을 읽었다.


행복한 사람들은 왜 행복한지 알고 싶었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최근 몇 년간은 매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신랑과 다투는 일이 있어도 앞으로의 내 삶이 불행해질 것이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도 뭐든지 하고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 정말 사소한 하루에

그 행복이 정점을 찍은 것.


언젠가 힘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난 이 글을 꺼내볼 것이다. 언젠간 또 다시 이런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온다.


당신에게도 좋은 날은 반드시 온다.


그걸 만들기 위한 작은 노력부터 시작하면 나의 하루하루들이 바뀌며 온전히 나를 위한 삶으로 바뀔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자유를 얻어보기로 했고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허브와 치즈 듬뿍 얹어 소스도 만들고
쯔유소스를 곁들인 버섯샤브샤브도 먹고
냉동실 정리도 하고
매실장아찌도 담궜다 ㅎㅎㅎ
화분들도 햇살 듬뿍 받는 오후 (고무나무-죽백나무-오렌지쟈스민나무-로즈마리) 요즘 화분들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당신도,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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