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엄마직에 종사합니다.
한국에서 놀이터에 갈 때마다 나는 보부상이 되곤 했다. 우리 둘째가 모래놀이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모래놀이 장비만 해도 한 짐이었고, 거기다가 모래놀이용 신발(이게 없으면 아주 누더기가 된다), 출출할 때 먹일 까까, 까까 먹고 목멜 때 마실 음료, 떼쓸 때 달랠 어린이용 비타민, 물티슈 등을 챙기면 트레이더조 가방이 꽉 찼다. 더운 날엔 공원에 물놀이용 분수를 틀어놓기 때문에 마른 수건과 아쿠아 슈즈도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한쪽 어깨에 커다란 에코백을 메고 다른 쪽 손으로는 킥보드를 끌며 놀이터와 집을 오가곤 했다.
짐이 많은 데에는 준비성이 철저한 나의 성격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국 놀이터에서는 저마다 자기 장난감을 가지고 나와서 놀기 때문이다. 큰 애들은 장난감이 없어도 되지만 어린아이들은 흙 놀이를 즐기기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물이 필요하다. 아예 모래 근처에도 안 가는 아이면 모를까.
이게 원래 한국 문화인지, 아니면 요즘 들어 생긴 한국의 새로운 문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놀이터에서 놀던 시절은 이미 먼(?) 옛날이 되어 버려서 잘 기억도 나질 않을뿐더러,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한들 아이의 시선으로는 전반적인 분위기나 문화 등을 조망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처럼 장난감의 개수가 많지 않았고, 그걸 매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모래놀이"용" 장난감은 아예 없었다. 그냥 엄마가 다 쓰시고 남은 화장품 공병에다가 흙을 가득 담거나, 떨어진 꽃잎을 주워다가 돌로 빻으며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니꺼내꺼 확실히 구분하는 문화가 만연하진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놀이터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부모가 된 후로 겪어온 놀이터 문화는 옛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니꺼내꺼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친구의 장난감을 허락 없이 만져선 안 된다. 그 덕에 아직 사회성이 미숙한 영유아 자녀의 엄마들은 아주 바빠진다. 자녀의 대변인이 되어서 할 말을 입에 넣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거 만져도 돼?라고 먼저 물어봐야지.
친구한테 잘 빌려줘야지. '만져봐도 돼'라고 말해줘야지.
아이들끼리 분란이 생기기 전에 먼저 예방하는 것도 엄마들의 몫이다. "친구야 미안해. 00가 지금 같이 놀고 싶지 않은가 봐. 대신 아줌마가 다른 거 빌려줄까?" 애들이야 아직 미숙하니까 실수를 해도 좀 용서가 되지만, 그 실수를 보고도 대변인이 나서지 않는 건 왠지 용납이 안 되는 분위기이다. 게으른 대변인은 '개념 없다, 민폐다, 애를 방치한다, 자녀 교육을 못한다'라고 비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금쪽같은 내 새끼, 아니 금쪽같은 대변인이 되지 않으려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특히 성격이 급하거나 에너지가 넘치는 자녀를 둔 엄마들은 몇 배로 바빠진다. 행여나 우리 아이가 실수로라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밀착 수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나다 나.
그렇게 살아온 지 어언 몇 년, 이제는 보부상과 대변인의 역할이 몸에 뱄다. 출신은 못 속인다고 여기에서도 나는 놀이터에 갈 때마다 짐을 잔뜩 챙기곤 했다. 물론 그중 반 이상이 애들 장난감이다. 그런데 며칠 놀다 보니 그 놀이터에서 보부상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누가 잃어버린 건지 기부한 건지 모를 정체불명의 장난감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고, 아이들은 다 함께 그걸 가지고 놀았다. 다 놀고 난 뒤엔 쿨하게 버리고 집으로 간다. 신기하게도 다음 날 와보면 어김없이 장난감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여기서 나고 자란 내니 왈, 캐나다에서는 개인용 장난감을 싸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그냥 다 같이 밖에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고. 그리고 자기도 그 장난감들이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겠다고...
이런 문화에 있다 보니 우리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미 "니꺼내꺼"가 깊이 각인된 우리 아이들은 남의 것을 함부로 만지지 않는다. 그리고 남도 자기 것을 만질 때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야 뭐 대인관계에서의 기본 예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캐나다 아이들은 이게 누구 것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난감마다 앙증맞은 이름표가 붙어 있긴 하지만 한글을 알 턱이 없는 이들에겐 그저 무늬에 불과할 테고, 그러니 당연히 공유하는 장난감인 줄로 안다.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이런 복잡한 사정을 아이들 스스로 설명하거나 알아들을 길도 없고, 엄마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설명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그러니 자기 것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우리 애들은 "내 거야!" 라며 소리치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펼쳐지곤 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장난감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쟁이로 비쳤을 것이다.
뭐가 더 좋을까? 니꺼내꺼를 어려서부터 잘 따져야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 마음을 기를 수 있으려나? 그게 바로 대한민국이 카페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된 비결일까? 하지만 니꺼내꺼 없는 문화가 남의 것을 탐내도록 가르치는 건 또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이 것을 공유하는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답은 모르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연구를 안 하신 것 같다.
하지만 며칠 겪어본 결과, 니꺼내꺼 없는 놀이터 문화의 장점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바로 엄마도 애도 편하다는 것이다. 엄마는 일일이 나서서 감시하거나 대변하지 않아도 되지, 보따리 싸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지, 할 일이 반으로 줄어든다. 애들도 자기 거 지킨다고 날 세우지 않아도 되고, 엄마 잔소리도 안 들어도 된다. 아무리 정답에 가까워도 서로가 너무 불편한 육아는 좋은 육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만큼은 나도 봇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다녀 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 반가운 알림을 받았습니다. 두 편의 글이 조회수 1000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보내주신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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