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상냥하게
캐나다에 온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웬만큼 적응해서 그런가 이제 새롭게 느껴지는 건 별로 없다. 여기도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으며 한국보다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이 나라에서 오래 살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또 여기가 파라다이스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순진하게 지상 낙원을 꿈꾸기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나이이다.
아니, 막상 살아보니 낙원은커녕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다운타운 중에서도 중심부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인지 "캐나다"하면 자연스레 떠올리는 광활한 대자연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매일 마주하는 건 거리의 홈리스들과 마리화나 냄새이다. 길바닥에 개똥은 또 어찌나 많은지 정신없이 다니다간 신발을 버리게 될 거다. 보도 위에 지도처럼 그려진 정체 모를 물자국은 멍멍이 것인지 사람 것인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누가 위생에 민감한 한국인 아니랄까 봐. 지천에 널려 있는 지뢰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느라 유모차 핸들링 실력 하나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아리땁지만은 않은 도시의 정경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대다수 사람들의 매너, 즉 타인을 대하는 정중하고도 친절한 태도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낯선 타인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적이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대단히 나쁜 사람과 엮일 확률도 낮았지만, 그렇다고 타인 덕에 기분이 좋아질 확률도 그에 못지않게 희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캐나다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미소짓게 한다.
한 번은 온 가족이 밖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우리 앞에는 건장한 남성이 커다란 개를 끌고 가고 있었다. 늑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덩치가 큰 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왠지 좀 무서워서, 우리는 일부러 느긋하게 걸으며 그와의 간격을 벌렸다. 그 둘이 우리보다 한참 앞서서 엘리베이터를 탔기에 진작에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붙잡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어...? 이렇게 오래 기다려준다고요? 빨리빨리의 나라에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긴 시간이었기에, 차마 우릴 기다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의 배려가 황송하게 느껴져서 나와 남편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그는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지. 너희는 아이들이 있잖아." 거기다가 그는 아이들이 겁먹지 않도록 대형견의 목줄을 팽팽히 당긴 채 구석으로 몰고, 자기 다리로는 방어벽을 세워 주었다. 우락부락한 그에게서 나온 섬세한 배려가 한동안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여기에서는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일단 자기 시야에 들어온 사람이 있으면, 좀 멀다 싶은 거리라 해도 그가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곤 한다. 특히나 나처럼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엄마들에겐 몇 배는 더 관대하다. 어딜 가든 유모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주고 문을 잡아준다.
내가 워낙 매너에 대한 역치가 낮았던 걸까? 처음에는 이러한 타인의 배려가 고맙다기보다 오히려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문을 잡고 있으면 와다다다 속도를 내서 얼른 들어가곤 했다. 지금은 점점 적절한 속도를 찾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문을 열어주는 것이 별 일 아닌 듯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다. 집 밖을 나서면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을 여닫게 되는가? 적어도 네댓 번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면 서른 번, 한 달이면 백 번이 넘는다. "일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타인의 따스한 마음씨를 경험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작은 날갯짓이 불러 올 나비효과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고마움을 경험한 사람은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래서 자신도 타인에게 고마운 일을 하나쯤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관계에서의 악순환은 야성대로만 살아도 쉽게 형성되지만, 선순환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타인을 위해 열어주는 문은, 누군가의 인생에 선순환을 만들어주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착한 마음씨들이 모인 사회는 좀 더 살 만하지 않을까?
그들의 매너는 문 앞에서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도 자주 나타났다.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먼저 들어가라고 양보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눈이 마주치면 가벼운 인사를 서로 주고받는다. 매너를 지키는 데에 과도한 친절은 필요 없다. 그저 퉁명스럽지 않은 말투,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 다그치지 않는 조금의 기다림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태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것 같다. 한국에서 키즈 카페나 놀이터를 갈 때는 초등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을 피하곤 했었다. 괜히 큰 아이들과 섞여서 놀았다간 덩치가 작은 유아들이 치여서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의 악의 없는 무신경함이 종종 위협이 되곤 했다. 예를 들어 유아들이 여럿 모인 곳에서 고학년은 되었을 학생이 거칠게 자전거를 타며 맴돈다거나, 옆도 살피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린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래 어린애 가진 부모가 더 조심해야지. 쟤들이 일부러 못되게 하는 것도 아닌데, 배려를 바라면 내가 이기적인 거지'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피하곤 했다. 저들도 악의 없는 아이들이니 이해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남의 자녀, 그것도 아직 덜 자란 아이들에게 매너 같은 건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때문에 여기서도 처음엔 바짝 긴장해서 아이들 뒤를 졸졸 쫓아다녔었다. 그런데 기우였다. 오히려 나보다 더 좋은 매너를 장착한 아이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이곳의 초등학생들은 좁은 통로에서 자기보다 어린아이들과 맞닥뜨리면 벽에 바짝 붙어서 동생들이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행여나 실수로라도 부딪히면 "아 유 오케이? 아임 쏘리"를 몇 번이나 말하며 다친 곳이 없나 상대를 살뜰히 살핀다. 몇몇 아이들만 특출 나게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매너가 좋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타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어른들을 보고 자라서일까?
아이들과 함께 실내 놀이터를 다녀온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매너가 좋은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매너는 인격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틀인지도 모른다. 그 틀이 고상한 모양새라면 그 안에서 자란 사람도 어느정도 품위를 갖추게 될 것이다. 내면의 수준은 외적인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매너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밥먹듯 무례를 범하게 되는 이유이다. 물론 겉만 멀쩡하고 속은 교활한 사람들도 있긴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매너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내면만 대단히 아름답기도 어려울 거라고 본다.
이곳에서 나는 과연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사람인지 자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볼썽사납게 삐져나온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잘 짜인 틀에 맞춰 다듬으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살게 되든 아이들에게 좋은 매너를 가르쳐주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