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하듯 서로를 파밍 한다면
(게임에서의 '파밍'은 특정 행위를 반복해 무언가를 수집한다는 의미이다.
*배그: 아이템 줍기 *롤: 미니언 잡기)
(1)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니 괜찮은 사람이 나를 알아봐 준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려면, 우선 내가 나여야 한다.
덜컥, 결혼을 했다.
노력하는 사랑은 싫다던 나는 오직 노력은 내 인생에만 쏟았다. 그러다 보니 혼자로도 충분히 바빴고 충분히 재밌었다. 사랑이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러다 새로 공부하는 자격증 수업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자기 멋대로 하는데 그게 불편하거나 싫은 게 아니라 그 모습이 나랑 똑같아서 신기했던 사람.
나는 사랑도 그 사람도 관심이 없었기에 내 멋대로 했다. 떠오르는 생각, 느끼는 감정을 전부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매 연애에서처럼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 내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했던 마음은 접었다. 그때의 나는 일종의 반항심 같은 마음에 꾸미지도 않고 다녔다. '진짜 사랑이란, 내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보고 찾아올 거야.' 싶은 마음에.
그러던 중 진짜가 나타났다. 이 사람은 나의 뭘 보고 감히 사랑이란 걸 했던 걸까. 우리는 잠도 안 자고 밤새 연락을 하고 매일같이 만났다. 그러다 한 달 뒤 결혼을 약속하고 한 달 뒤 상견례를 하고 한 달 뒤 같이 살기 시작했다. 결혼 생각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직업도 없고 하고 싶은 것만 많은 이 자유로운 영혼을, 이 사람은 존중했다. 언제나 기다려주고 그 자리에 고요하고 단단하게 서 있다.
같이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분명하다. 스스로의 감정과 가치를 믿고 따르는 용기가 있다. 그렇기에 그 용기를 위해 서로는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노력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에 대한 내 엉터리 가치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 결혼 일기
'서로의 아이템을 모으다 보면 어느새 레벨 업 되어있겠지.'
알고 보니 내 남편은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었다. 별다른 이상형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쌓아온 한 편의 판타지 같은 것. 운동을 잘하는 건전한 체대 오빠,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는 남자. 생각이 깊고 진중하지만 노잼은 아닌 유잼 남자. 애교가 많은 귀여운 남자, 말을 예쁘게 하는 다정한 남자. 나열해놓고 보니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이상형이 된 건가 싶어 좀 웃기긴 하다.
담배 피우는 남잔 안 만난다는 말에 단 번에 담배를 끊어버린 독한 남자. 타의든 자의든 내 앞에선 비속어 한 번 꺼낸 적 없는 남자. 지금 보니 이상형이 뿅 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걸 피해 기꺼이 나의 이상형이 되어준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도록 행복하려면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하지 말라는 시아버지의 말씀처럼.
그런데 딱 하나, 이 남자 게임을 참 좋아한다. 나는 게임을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게임하는 사람들의 집중과 몰입이 부럽고 대단하다. 다만 같이 할 수 있는 취미가 아니기에 같은 집에 있어도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 조금 아쉬울 뿐이다. 나는 컴퓨터를 켤 줄도 모른다. 게임에는 평생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어느 날은 뭐가 그렇게 재밌을까 궁금한 마음에 게임을 관전했고, '파밍'이란 단어가 들려 물어봤다. 파밍은 아이템을 줍는 일이란다. 게임마다 뜻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엔 얻고 수집하는 것을 위한 일 같았다.
우리는 연애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바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기에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성격도 취향도 생각도 공유해 보지 못한 게 훨씬 많다. 그저 맞는 마음 하나로 시작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지금 '파밍' 단계가 필요한 것 같다. 어쩌면 같이 살면서 평생을 해야 할 일이기도 하겠지.
서로의 아이템을 줍고 수집하는 단계. 우리 부부가 택한 파밍은 저녁 시간에 책 읽기와 일기 쓰기다. 길면 숙제가 되기에 단 10분을 투자한다. 결혼 일상을 일기로 기록하고 책에서 좋아하는 부분에서 화두를 던져 대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의 마음도 게임을 하듯 집중과 몰입의 시간을 자주 가져주면 어느새 우리도 레벨 업 되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