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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수희 Dec 01. 2024

15 내가 누구게?

그때!

잿빛 하늘도 어느새 검게 물들었다. 그때!

그 어둠을 찢고 날아오르는 빛나는 한 마리 백호 같은 남자가 말 그대로 날아오르듯 단숨에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그야말로 뜬금없고 갑작스런 일이 아닐수 없었다.

연극의 막이 내려가고 다음 무대의 주인공이 등장하는것 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오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곧장 돼지의 몸통으로 달려들었다.

바닥에 뒹굴던 신장칼을 집어 들고, 마치 식빵을 자르듯 정신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돼지의 몸통도 빵 이 잘려 나가듯 조각조각 잘도 부서져 나갔다.

칼끝에서 터져 나온 돈 혈은 팥처럼 여기저기 흩뿌려지고 남자의 하얀 한복에도 점처럼 골고루 튀어 박혔다.

어둠 속에 빛나는 검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돼지를 쳐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곧 돼지는 산산조각이 났고 위아래 하얀 한복을 차려입은, 앳돼 보이는 남자가 손에서 칼을 내려놓고 아비규환이 된 작은 돼지 몸통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한다.

급한 마음이 내비치는 덜덜 떨리는 남자의 손끝에 드디어 조그만 무언가가 딸려 나왔다.

팥죽 같은 오물을 밀어내자, 드러난 건 검은 머리카락에 촘촘히 감겨 있는 네모반듯한 작은 천 쪼가리.

남자의 심장이 순간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피가 거꾸로 솟아 그 분노가 폭발했다.

“이 벼락을 맞을 것들!!.”

그의 처절한 목소리는 지축을 흔드는 천둥처럼 퍼졌다. 그 울림에 옥상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골목 구석구석 그 분노가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의 다음 행동은 준비된 듯 잽싸기도 했다.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소금이 있는 자루에 그것을 한번 휘적거려 꺼내고 품에서 부적을 하나 꺼내 갖다 붙여 두고 손을 모아 경문을 외기 시작했다.

“옴 소마니 소마니 훔 하리한나 하리한나 흠..”

남자가 경문을 외자 그저 관망하고 있던 무당이 요란하게 색을 칠한 눈두덩이를 가늘게 접으며 교활한 눈빛을 그대로 내비쳤다.

“애동(갓내림받은제자)치고 제법이네, 흥!.”

“컥! 헉허...”

자신의 품에서 새하얗게 질려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딸에게 순식간에 핏기가 돌고 숨통이 트인 것을 확인한 혜란은 미친 듯이 딸의 얼굴과 손을 계속 만지며 ‘괜찮아, 이제 괜찮아’를 반복했다.

‘이번만큼은 절대 널 잃을 수 없어. 두 번 다신 널 잃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마치 한 순간이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듯, 딸의 얼굴을 붙잡고 흔들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남자도 이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부들거리는 주먹을 어찌하지 못하고 해괴한 면상을 하고있는 무당의 코 앞까지 저벅저벅 다가간다.

얼음장 같은 눈빛, 온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서릿발처럼 날 선 말들을 무당에게 내리꽂는다.

“신을 업고 살아야 할 무녀가 신을 속여 그 등에 업혔다? 네가 올라탄 신이 언제 뒤집힐지 내가 말해줄까?.”

그는 서천 무녀를 꿰뚫는 눈빛으로 경고했다.

“네까짓 게 뭐라고.”

그렇게 말하는 서천 무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너는 떠도는 망자들을 달래겠다 신 을속여, 그 힘으로 인간을 해치는 데 썼으니, 힘 을 빌려준 신령은 죄가 없을 거 같으냐?.”

“뭐라? 이 잡놈이 지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떠는 거야??”

말은 쥐어짜냈지만 그녀의 안색은 이미 지옥 문틈까지 다달은듯  눈두덩이처럼 시퍼레졌다

반면 무당의 나이 반토막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이 남자는 눈썹 하나 들어 올리지 않고 그녀를 하찮게 내려다보며 경고한다.

“신이 왜 신인지 알아? 인간은 허튼 실수를 저지르지만, 신은 그럴 수 없어. 그 실수의 대가는 네 신령이 너와 함께 치르려는 것 같구나. 널 지옥불 로 끌고 가려고 말이야. 이미 널 찾고 계셔, 화가 단단히 나셨네. ”
 
남자의 기운과 기세가 이미 그녀를 집어삼켰다.

서천 무당의 얼굴에 일순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후회. 죄책감. 두려움.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남자의 말은 허세가 아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었던 걸까? 남자에게 알아듣게 몇 마디를 하고 자리를 뜬다.

“그래봤자 늦었어. 사람이면 제정신으로는 못살 것이고 제정신이라면 죽어야지. 살아서 뭐 해. 가자!.”

그것이 시작이었다.
수련이 미치기 시작한 날의 시작.

무당을 따르는 이들은 무구를 챙겨 마치 처음부터 동선을 맞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옥상을 빠져나갔다.

혜란이 그제야 뭔가 제대로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이 상황에. 누가봐도 구세주인 한복을 입은 남자를 다급히 불렀다.

“저·저기요. 도와주시러 오신거죠?.이제 우리 딸 괜찮은거죠? 제딸좀 봐주세요. 사례는 얼마든지 할께요.”

방금 무당을 몰아붙이던 모습과 달리, 온 힘을 다해 견뎌온 듯, 이 모녀 앞에 다가선 남자는 순식간에 무너져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무릎꿇었다.

산 사람도 씹어먹을 것 같던 방금의 호랑이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소년이었다.

“제가 조금만…. 단1 분 만이라도 빨리 왔더라면..”

그토록 강철같고 용맹해 보이던 남자가 이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니 혜란은 불길한 마음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저 무당이 한말이 뭔데요?우리애한테 무슨일이 생겨요?.”

남자는 말없이 손에 쥔 천 쪼가리를 혜란에게 내밀었다.

냉큼 받아 든 그것은 혜란의 눈에도 무엇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감긴 네모난 천 쪼가리. 그 안에 김수련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혜란은 퍼뜩 떠올렸다. 어느날 수련이 교복에 꿰매진 명찰을 체육 시간이 지나고 와보니 누군가 떼갔다며 수선을 맡긴 적이 있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그럼, 이 머리카락도? 그런데 왜? 나는 이 집의 귀신을 없애달라고 굿을 한 것 뿐인데. 왜 우리 수련이가?”

“그건 저도 잘…. 산제물을 바치는 진오귀굿은 없어요..사혼굿이라기에는 제물도 형식도 달라요.  그냥 망자들을 올려보내는 굿은 아니었어요. 특히 산돼지 같은 제물은 강력한 주술을 쓸때만 사용해요. 떠도는 망자들을 수련이 라는 그릇에게 들러붙게 하는 게 목적이었던 거 같아요. 제가 급하게 퇴치하긴 했는데 어떻게든 수련이에게 남아있으려는 혼도 있을 거고 마지막 무당의 말은.. 아마도 수련이는 앞으로도. 저처럼..”

그저 어른과 소년의 경계쯤 되는 선한 눈망울 의 남자였다.

왜인지 몰라도 죄인처럼 모녀앞에 꿇어 앉아 곧 터질것 같은 눈물을 붙잡고 있다.

혜란은 이 비범한 남자를 놓을수 없었다. 남자의 한복 소매 춤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쪽이 어떤데? 무당이에요? 우리 수련이 그런 거 못 해요. 안돼!.”

남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뭇대며 말을 이었다.

"제가 무당은 아니고요. 무당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 구급차가 도착했고 수련이를 옮겼다.

구급차가 출발하기 전 수련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요란한 소리, 번쩍번쩍 빛나는 불빛. 그 사이로 실눈을 뜨고 밖을 내다본다.
 
한 남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수련의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련은 구급차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엄마에게 묻는다.

“저 남자는 누구야? 저 빨간 땡땡이 한복?
졸라 잘생겼네. 근데 왜 이렇게 졸려.”

00대학 병원 응급실.

겨우 진정제를 맞고 혈색도 돌아온 수련.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인다는 응급의의 소견을 듣고 혜란은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을 흘리듯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그때 응급실에 따라 온 지훈이 혜란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까는 급해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저 지훈이라고 합니다. 신지훈이요.”

안 그래도 이 남자의 정체를 알고 싶었는데 제 발로 따라와 먼저 인사까지 해주니 고맙긴 하였으나 고개를 까딱하며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

그 표정을 읽었는지 지훈이 웃으며 띄엄띄엄 힌트를 주듯 말한다.

“수련이 초등학교 동창, 저희 할머니….”

혜란은 불에 덴 듯 온몸이 화끈거렸다.

‘잊다니. 내가 이 아이를 잊다니!. 벌써 이렇게 컸구나.’

“아! 완전 어른이 다 됐네.! 정말 몰라보겠구나! 몰라볼만도 하지! 너무 커버렸어. 그 꼬맹이가. 내가 다 장하다. 어머니랑 할머니는 다 건강하시고?.”

혜란은 십 년 전 그 집에서 문전박대당했던 일을 떠올렸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지훈은 뒤통수만 멋쩍게 긁으며 다른말을 한다.

“아 제가 여기 온 이유가 있는데요. 이거좀..”

지훈은 소매춤에서 부적한장을 내밀었다.

“이거 부적같은거니? 수련이가 가지고 있으면 되는거야?.”

“네. 그렇긴한데 그 무당이 어떤 주술을 어떻게 쓰고 간지도 모르겠고 자기 목숨걸고 굿판까지 벌여 날린 살이라면 그게 얼마나 수련이를 지켜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당장은 필요해요. 지금 처럼 수련이가 정신을 잃거나 잠들어 있을땐..”

혜란은 머릿속이 터질거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게 산더미인데 뭘 어디서부터 물어야할지도 모를만큼 모든게 감당이 안될만큼 쏟아져 들어왔다.

“나 사실 아무것도 이해가 안돼. 일단 내눈으로 보고 들은게 있으니까 시키는데로는 할게. 근데 혹시 잠들어 있을때가 더 위험하다는 뜻이야?.”

답답한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지만 지훈역시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네 일단은 쉽게 설명 드리자면 수련이는 정신력이 강하니까 평소에는 어지간한 원념이 있는 악귀가 아니라면 이겨낼수있을거예요.”

수련의 몽유병을 떠올린 혜란은 어느정도 이 말을 수용했다.

“일단 알았어.”

혜란은 그 자리에서 수련의 호주머니에 부적을 넣었다.

“그리고 지금 수련이 상태에서 이런 곳은 위험해요. 망자들이 너무 많이 떠돌아다니는 이런 곳은 위험해요.”

혜란의 눈이 번뜩였다. 만신 성자의 손주다. 아까의 상황을봤을때 이 아이의 말을 허투로 들어선 안된다.

혜란은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마침 응급실 문을 거칠게 열고 문일이 뛰어들어 왔다.

“수련이..수련이는!.”

정신없이 침상들을 훑어 보는 문일은 평소에 침착함은 전혀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잘알았던 혜란이 곧장 그에게 달려가 수련의 상태를 보여줬다. 안심시켜줬다.

그래도 문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어디로 분출해야 할지 누구에게 이 화를 던져야 할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눈앞에 빨간 피가 하얀 한복에 온통 튀어 박힌 기이한 차림의 남자가 문일의 눈에 수상하게 들어왔다.

“이놈 너 뭐야! 네가 한패거리야? 네가 한짓이야? 말해! 뭘 어떻게 했길래 애가 이지경이야?.”

문일이 이성을 놓고 막 지훈의 멱살을 잡는 순간! 지훈의 상반신이 스륵 미끌리듯 하더니 그대로 잠시 정지하였다. 혜란이 겨우 뜯어 말리며 상황을 설명하는동안.

신내림도 받지 않았던 당시 지훈에게 처음으로 선명한 화경(신의눈으로볼수있는장면이나세계)이 떠올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신령님의 말이 지훈의 입에서 제멋대로 터져 나왔다. 표정도 지훈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구슬을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깊던 홍채가 마치 만 년 동안 살아 모든 것에 통달한 노인네 같은 회색빛으로 예리하게 빛났다.

한심한 눈으로 문일을 향해 내뱉는 말도 그 와 찰떡이었다.

“쯧쯧쯧…. 짐승도 이런 짓은 안 한다. 살고 싶으면 빌어라. 여섯이다. 여섯이야. 빌어! 좋은데 올라가라고 싹싹 빌어! 안 그러면 너 제명에 못 죽어!.”
 
문일은 순간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자기한테 한 말이 분명했다.

“이자식이 너 뭐하는놈이야? 이새끼가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미친놈이야? 너 내가 누군줄알아?.”

문일이 다시 지훈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민중의 지팡이가 차마 시민을 후두러 깔 수는 없는일.

그때 살기등등 하고 칼끝처럼 뾰족했던 지훈의 두 눈이 다시 순하고 검은 눈동자로 돌아와 종잇짝 처럼 문일에 손아귀 에서 나부꼈다.
 
그리고 그 깊고 선한 눈자락 끝에 뜻 모를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지훈은 문일의 어떤 화경을 들여다보고 온것일까?  
똑똑히 전달 되도록 단 한마디 를 전했다.

“아저씨.. 비세요. ”

**
000불당.

법당을 떠나기 전, 대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깊이 사죄드리는 지훈.

그동안의 은혜와 못다 한 수행에 대해 속죄하는 그의 어깨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결단의 깃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붉은 장삼을 왼쪽 어깨에 두르신 대 스님은 지그시 감은 눈과 함께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지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 하였으니, 모든 인연도 너의 마음먹기에 따라 결국 갈 곳으로 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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