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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지막으로 딱 하나

타자기를 사랑하게 된 후 생긴 변화

by 밍님




2022년 절제할 수 없었던 수집 욕구로 집에 타자기가 더 이상 보관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그래서 2023년 1년 목표는 '타자기 구입하지 않기! 였다. 갖고 싶은 타자기가 보여도 꾹 참고 매일 하던 타자기 검색부터 참았다. 타자기 구입 대신 책을 열심히 읽고 타자기로 독서기록을 남겼다. 독서기록장을 타자기로 타이핑해서 작성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2023년은 다른 해보다 2배 정도 독서량이 많았다.


타자기는 나에게 집중하며 즐기는 시간을 갖게 해 준 것뿐만 아니라 내 인생을 더욱 다채롭게 해 주었다.

먼 나라에서 빈티지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과 이메일로 대화하게 해 준다던지, (물론 나는 파파고의 도움을 얻었기에 대화가 매끄럽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서로 정중했고 의미가 다 통했기에 거래가 성립되었으니 상대방도 즐거운 대화였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bay 경매를 하면서 심장이 쫄깃해지는 순간도 경험해 보았으니 말이다.


또 나에겐 인스타그램이라는 SNS에서 타자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만나게 된 세계 곳곳의 수집가 친구들이 있다. 서로의 멋진 수집품을 부러워하고 타이핑 결과물을 칭찬하며 간혹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일상을 위로받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라는 타자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알게된 '타자기 선언문'

마치 중요한 종교의식인 양 경건하게 '타자기 선언문'을 타이핑해서 액자에 보관해 두었다. 타자기 선언문을 내 인스타 계정에 올렸고 (인스타그램- 우주인타자기) 'The Typewriter Revolution: A Typist's Companion for the 21st Century'의 저자이자 타자기 선언문을 만든 Richard Polt가 내 사진을 보고 한글버전의 타자기 선언문을 본인의 블로그에 스크랩하고 싶다며 댓글을 달았다. 나는 작은 오타(혁명에 받침 'ㅇ'이 하나 더 타이핑된 것)가 매우 아쉽지만 블로그에 소개된다면 영광이라고 답했고 그는 본인의 인스타 피드에도 블로그에도 나의 타자기 선언문을 올렸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타자기계 국제적인 데뷔랄까 나에겐 너무 흥분되었고 기뻤던 일이었다.




2023년 늦가을.

아빠가 오랜 지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일주일,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자마자 아빠가 계신 병원에 갔고 몇 시간을 울다가 집에 오면 내 안의 슬픔을 토해낼 곳이 없어 종이에 쏟아냈었다. 아빠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 후회했던 일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빠와의 작은 일상들까지 하나라도 잊지 않게 생각나는 대로 타이핑했었다. 아빠랑 함께 있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자꾸 글을 쓰게 된다는 타이핑을 보고 타자기 친구가 'Good child, pat pat'이라며 위로해 주었다. 얼굴도 모르지만 인스타에서 가끔 소통해 왔던 친구의 그짧은 댓글에 뭉클했던 기억. 타자기 덕분에 알게 된 친구들과의 짧은 소통이 내겐 더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


2023년 절제의 시간을 보낸 나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2024년이 시작되자마자 타자기를 한 대 구입하였다.


Reminton사의 BANTAM이라는 이 타자기는 많은 편의 기능들은 삭제된 타자 연습만을 위한 교육용 타자기이다. 알록달록 사탕 같이 귀여운 Key들을 보고 반했지만 한 달쯤 고민하다가 구입했다. 시리얼 번호로 검색한 이 타자기의 출생연도는 1938년! 고딕체의 깔끔한 대문자

정말이지 사랑스러워 놓칠 수 없었던 수집품이다.



타자기를 사랑하게 된 뒤에 생긴 가장 멋진 변화는 내가 정말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타자기 왜 치는거야? 엄마는 나중에 작가 될라구?"라는 아이의 말 한마디에 불타오른 창작욕구가 몇 년째 여러 공모전에 도전하게 하더니 결국 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었다. 어린시절과 가족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열등감 가득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이 다르게 보였다. 지금까지 나는 꾸준히도 사랑받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언니들은 특별한 날에 어린 동생이 아무런 선물도 받지 못할까 봐 동화책 '코코 아저씨'를 만들어 주었다. 친구들처럼 문방구에서 인형 드레스를 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집에 있던 천을 잘라 인형 옷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자기들 쓸 돈도 없으면서 내게 용돈을 주었던 언니들, 아빠와 수요일마다 라면을 먹었던 일, 반찬을 주고 싶어서 연락도 없이 내 직장에 왔던 엄마...

내 안에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나는 많은 경험을 하며 자라왔고 충분히 사랑받았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이 조금은 더 성숙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런 변화의 시작은 타자기 덕분이지만 나는 앞으로 더 이상 타자기를 사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없이 가벼워진 통장이 가장 큰 이유이고 부족한 수납공간도 문제가 되었다.



가끔 둘째가 나를 유혹한다.

"엄마가 갖고 싶어 하는 피아노 같이 멋진 타자기 내가 사줄게!"

유광 블랙의 그랜드 피아노 같이 예쁜 스탠다드 타자기가 늘 갖고 싶었지만 참았는데 조만간 효도선물로 받을지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내 통장으로 하는 타자기 수집은 이제 멈추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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