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총량은 개인의 본성에 의해 정해져 있다.
고통의 종류가 수만 가지여도
결코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통과 행복은 외부의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향과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성향은 나이가 들거나 건강 상태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말>
인간은 나이가 들어도 결국 비슷비슷한 고통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유년 시절부터 인간관계가 고통스러웠던 A는 나이가 들어서도 인간관계가 고통스럽습니다. 유년 시절에 돈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B는 나이가 들어서도 돈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고요. 건강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C는 건강이 회복되어도 또 건강이 나빠질까 봐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 취약한 A는 C보다 건강이 나쁘더라도 C만큼 건강으로 인해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향과 관심 그리고 결핍이 다르고, 이 다름이 무엇에 대해 고통스러울지 취사선택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은 잘 변하지 않기에, 나이가 들고 철이 든다고 해도 그 선택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한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종류는 변하지 않고, 뫼비우스의 띠를 도는 것처럼 만들어진 고통의 경로를 돌면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무한히.
나이가 들어도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내'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의 '성향'이 변하지 않기에 같은 종류의 고통 때문에 어려서든 늙어서든 크고 작게 신음하며 살아가곤 하죠. 살던 대로 살다 보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나의 의식과 생각이 그 고통을 인생에 허락하고 있으니까요.
살던 대로 계속 사는 건 참 좋지만, 이 고통과 영원히 함께 해야 한다고 하니, 무섭고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덜 고통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질에 따른 경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향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고통으로 이끄는 성향들이 점점 곰팡이처럼 자라나서 인생을 고통으로 뒤덮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니까요. 고통으로 뒤덮여버린 인생.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5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하다.
이상적이다.
타인의 평가에 집중한다.
유머감각이 없다.
욕망이 크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갖기 쉽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거나, 내부에서 생겨나는 미세한 감각에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외부에서 겪게 되는 작은 성공과 실패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작은 실패들을 과도하게 확대해석하며 '이번 생은 망했다(이생망)'라며 자포자기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죠. 이렇게 생겨버린 감정은 고통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줄 '희망'을 앗아가 버리기에 고통스러운 감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기 쉽습니다.
그리고 너무 이상적인 사람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누구에게나 나타나지만 이상적인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을 자신의 이상으로 바꾸려고 크고 작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현실은 잘 변하지 않죠.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이 현실을 바꿔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혼자만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치고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라고 이야기하며 사회주의라는 그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체 게바라. 자신의 이상의 불꽃으로 현실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현실은 그의 이상과는 달랐습니다. 그렇게 그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꽤나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나는 한 명이고 타인은 수없이 많은데,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그 많은 타인의 평가에 집중하며 살곤 합니다. 그들은 그래서 정신이 없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기준에 맞추다 보면 그 끝이 없기 때문이죠. 살아가면서 시대는 바뀌어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달라지는데, 그때마다 시대와 주변 사람들에 맞추다 보면 또 다른 종류의 괴리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한 가지, '나'에게 집중하면서 살면 되는데 우리의 시선은 외부로만 발달되어 있고, 내면을 바라보는 시력은 너무나도 나쁘기에 자연스레 타인의 평가에 집중하게 됩니다. 결국 '나'를 잊어버리고 타인을 만족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되고, 고통이 만연하게 됩니다.
고통은 우리의 얼굴에 주름을 만듭니다. 하지만 유머로 인해 미소 짓는 순간의 사용하는 안면 근육은 그 주름을 펴는 역할을 합니다. 피부에 있는 주름처럼 마음속에 있는 주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별게 아닌 게 되기도 하는데 심각하게 생각할수록 그 골은 깊어지죠. 깊어진 골은 저 밑에 있는 내면의 중심을 공격해서 존재 자체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즐겁게 살아야 한고, 웃어야 하며, 유머러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면 고통의 주름을 피기 위해서, 깊어진 주름 때문에 몸과 마음이 늙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죠.
욕망의 저 밑에는 불만, 결핍 그리고 고통이 있습니다. 욕망한 것을 얻어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것에 대한 불만과 결핍이 우리를 욕망에 빠져들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고통스러워질 것입니다.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욕망을 비우고 현실의 자족을 채워 넣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냥 오늘 하루 무탈하게 살아낸 것, 따듯하게 잠을 자고, 굶지 않고 밥을 먹고, 큰 고통이 없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욕망해도 결국 소용없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
유머감각은 조금 있는 편이지만, 예민하고 이상적이며 타인의 평가에 집중하며 욕망이 큰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남 모르게 제 삶은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나요? 당신의 성향 중에서 고통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너무 예민한가요? 그러면 조금만 대충 살아보세요. 너무 이상적인 가요? 현실적인 꿈으로 바꿔보세요.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집중하나요?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말아 보세요. 유머감각이 없나요? 개그 프로그램이라도 찾아서 보세요. 욕망이 너무 크다면 유튜브에서 '아프리카 난민'이라고 검색해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물론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어느 것보다 변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꾸준히 자신의 성향에 대해서 살펴보고, 고통을 유발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바꿔보세요.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이 그리 무겁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만족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저울을 가지고 고통의 무게를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고통이 너무 버겁다면 내가 고통을 느끼는 저울을 살펴보세요. 다른 사람의 저울로 쟀을 때는 5kg밖에 나가지 않는 고통이 나의 저울에서는 10kg이 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고장 난 저울이 만들어낸 고통의 무게 때문에 인생이 답답한 고통 속으로 뒤덮여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