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ㅑ2ㄷ4ㅕ23- 욕을 삼켜가며 회사에 출근하는 나를 볼 때
스물 여섯에 처음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느꼈던 건, 아빠에 대한 무한한 감사였다.
(물론 엄마도 엄마지만) 인생을 살면서 아플 때건, 무슨 일이 있을 때 건, 너무나 기분이 나쁠 때 건 나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나란 인간이 월-금 8시부터 5시까지는 회사에 무조건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엄청나고 끔찍한 일을 정년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해온 우리 아빠가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조금이라더 덜 막히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려고, 아침에라도 책 한자 보려고 여섯시 반 쯤 일어나 광역버스에 몸을 구겨 넣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 비몽사몽하다가도, 4층도 넘는 것 같은 회사 건물 로비의 흰 대리석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다가 사원증을 띡- 찍고 엘레베이터를 타는 그 순간, 그게 참 좋아서 나는 회사를 무사히 1년 잘 다녔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 때는 정말 몰랐다. 그 때 내가 버는 돈이야, 내 용돈 정도였고 엄마 아빠와 같이 살고 있었고, 교통비도 아빠 카드가 내주고, 가끔씩 맛있는 것도 아빠 카드가 내 줬었으니까. 매달 나가는 아파트 관리비와, 통신요금, 보험료, 대출금 이자 같은건 정말로 하나도 모를 때 였다.
그런데도 아빠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 이 끔찍한 일을 어떻게 몇십년이나 해내는거지, 아빠라는 사람들은, 하고.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다.
처음으로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 혼자 살게 되면 그렇게 사야 할 게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집에 당연히 매일 있던 샴푸며, 비누, 화장지며 세제는 왜 그렇게 자주 사야 하는 것인가) 자취를 처음 시작한 후 한 10개월 쯤 후, 내 방 문앞에는 단전을 알리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까지 오피스텔에 살면 임대인에게 월세를 내는 것 말고 건물에는 관리비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우리 엄마는 헛똑똑이인 내가 그런 걸 모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고, 여튼 몰랐던 나는 10달을 넘도록 한 번도 관리비를 안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하나씩 삶의 무게를 배워갔다. 어느 날은 눈물이 마구 나는데, 당장이라도 이놈의 회사 내일부터 안나오겠습니다, 라고 하고 싶은데 당장 모아둔 돈이 없으니 몇달 후 월세를 낼 생각에 눈 앞이 캄캄했다. 월급날을 기다려 무언가를 사는 것이 조금 익숙해지고, 언제라도 그만두고 싶을 때를 위해서 돈을 조금이라도 모아둬야지 하는 나를 기특해 하다가도 무이자 할부에도 익숙해지는 나를 보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정말 일을 그만 하고 싶다, 이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정말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문득, '빌리언즈'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다는게 나의 그 무력감의 유일한 이유라는걸 깨달았다.
내가 사고 싶은 옷, 신고 싶은 신발, 쓰고 있는 향수, 쓰고 있는 바디로션, 지금 살고 있는 집, 지금 타고 있는 차,를 유지 하기 위해서는 나는 이 회사에 다녀야만 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돈을 좀 덜 버는 길이 꿈을 당장에 이루어주는, 정의로운 길인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성공의 가도도 아니라는게 더 나를 갈팡질팡하게 한다.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것보다는 좀 더 노블한 것일텐데! 하는 무한한 이상(?)이 오늘도 어깨를 엄청나게 무겁게 한다.
우리 아빠는 이 무력감과, 형체와 무게를 알 수 없는 꿈이라는 것과, 집에 오면 응앙응앙 울어대는 자녀라는 것들과 부모에 대한 의무감과 연민 그 많은 것들 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낸걸까. 그것들이 아빠의 얼굴과 손과 마음에 얼마나 많은 자국과 상처를 남겼을까.
무거운 무력감이 가시지 않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