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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아무르 Oct 21. 2023

아름다운 겨드랑이 털




“난 패션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 


피터와 나는 이제 막 푸릇푸릇하게 올라온 잔디밭 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봄이 라 공기는 아직 차가웠지만, 햇볕은 따뜻했다. 피터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이십 대 중반의 친구 였다.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냐는 그 아이의 질문에 꾸밈에 대한 대가가 너무 크다고 대답 했다. 명품 산업이건 패스트 패션 산업이건 내게는 둘 다 돈 써가며 지구를 망치는 집단일 뿐이 었다. 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이 아닌데 사람들은 옷장에 옷과 가방을 쌓아두고 또 소 비한다. 며칠 행복해지자고 한 행위에서 발생하는 환경 파괴 비용은 너무도 크다. 옷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화학용품, 동물을 이용한 잔인한 생산과정, 옷을 염색할 때 발생하는 오염, 공장이 열심 히 돌아가면서 만드는 오염물질.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패션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물었을 때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표현하는 하나의 예술이지.” 


피터의 대답을 반만 이해한 채로 몇 년이 흘렀다. 피터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나는 프랑스에 남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저 그런 날들이 흐르던 어느 날, 나는 지루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로 멋을 낸 젊은 남자 , 눈에 띄지 않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듯한 옷차림의 중년 남자,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싼 여자, 


이슬람 여성들의 전통 복식 중 하나인 히잡을 한 여자, 그리고 집히는 대로 따뜻한 게 최고라 며 아무렇게나 입은 나. 


제일 먼저 내 시선을 끈 건 화려하게 멋을 낸 젊은 남자였다. 그를 보며 문득 내가 화장이나 옷 차림에 신경 쓰지 않은 이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꾸밈을 하지 않은 외모가 나를 무명으로 만든 것이다. 그때야 피터가 한 이야기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인간이나 동물은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싶어 하며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표시하려는 본능이 있 다고 한다. 어디선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무실 책상은 내가 앉기 전에는 무명의 장소다. 내가 앉 아서 집에서 가져온 나의 물건을 놓기 시작하면 그것은 비로소 나의 장소가 되고 나는 조금 더 편안함을 느낀다. 학교 공간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한다. 학교 공간은 개 성이 지워지고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 공간인데, 자신의 영역을 가지려는 본능을 가진 학생들은 그 본능을 채우기 위해 책상에 낙서하거나 하다못해 실내화에 이름을 적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 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 몸이라는 영역이 나의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꾸밈을 한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 되기도 한다. 다만, 그 꾸밈이 말 그대로 ‘진정한 나’를 보여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사회가 정해준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인지는 생각 




해 볼 필요는 있다. 


내가 시골의 작은 마을 풍경 중에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젊은 사람들이 구멍이 난 티셔 츠나 낡은 바지를 입고 있거나 열심히 걸은 흔적이 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집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옷을 입은 것 같진 않다. 이들도 자신을 표현하는 옷차림을 한다. 다만 자신의 몸이라는 영역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실용과 신념 또한 놓치지 않는다. 


시골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선택에 의해 그곳에 머무른다. 자연이 좋다든지, 조용한 삶을 원한다든지, 사람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좋아한다든지, 하고자 하는 일이 그곳에 있든지. 아무래도 자연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자연과 환경에 관심이 많고 활동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몸 이라는 영역을 표현하지만 불필요하게 많은 소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역을 표현하는 것이 꼭 많은 소비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시골 마을에 연극을 보러 갔을 때, 내가 본 광경은 이랬다. 아이들은 전부 활동에 편한 옷을 입고 사방을 뛰고 뒹굴었다. 어른을 흉내 낸 옷차림이나 유행을 따른 듯한 아이는 없 었다. 준비된 장난감은 모두 나무 장난감이었고 한구석에는 나뭇잎이 잔뜩 달린 나뭇가지 한 무 더기가 있었다. 아이들은 그 단순한 나뭇가지를 가지고도 수많은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야외에 설치된 간이식당에서는 일회용품 대신 유리 접시를 썼고 한구석에는 먹은 사람이 그릇을 닦을 수 있도록 거대한 고무통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행 사를 위해 유리 접시를 통일해 구매한 것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가져온 듯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는 점이다. 한 여자는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 먹는 간식, 크 레프 crêpe를 팔고 있었는데 한 아이는 크레페를 굽고 다른 아이는 손님을 맞는 역할을 했다. 여 자는 옆에서 아이들에게 간간이 도움을 줄 뿐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빨간색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는데 털을 제거하지 않은 겨드랑이가 보였다. 그녀는 내 나이 즈음 되어 보였고 그렇다 면 선택에 의해 제모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몸에 신념을 드러냄으로써 몸이 자신의 영역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구멍 난 티셔츠가, 여기저기 걸은 흔적이 묻어있는 신발이, 아이들의 무릎 튀어나온 바지가, 그리고 그녀의 겨드랑이 털이 새로 산 가방보다 더 개성 있고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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