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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굴뚝새를

김유림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69).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우리가 굴뚝새를


김유림



버려도 되는 것과 버리면 안 되는 것. 그것은 같은 것이다.

유림은 고개를 들어 굴뚝을 보았다. 굴뚝은 그 자신의 자리

에 있었지만 오늘 처음 발견되었다. 유림에게. 유림은 집에

서 나와 먼 길을 가야 할 때 가야 하는 길을 걷고 있다. 그 길

에는 오래된 집이 하나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집으로 보

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집이다. 유림은 그것을 알고 가

끔은 그것을 이루는 벽을 집으로서 바라본다. 예를 들면 이

런 것이다:



벽은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벽과 만나는 양철 지붕

은? 고양이의 거처다. 한낮의 고양이 한마리가 거기 있다.

고양이가 동네 맛집으로 알려진 스시집 뒤편에서 낮잠을 자

기도 한다. 여유로운 고양이가…… 낮잠을 자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겠지. 그러나 모른다. 고양이의 졸린 눈과

마주친 어느 날의 거리에는 유림만 있거나 유림과 유림과

동행하는 이가 있을 뿐이다.



또 예를 들면 굴뚝 같은 것이다. 굴뚝은 오래된 아이보리

색 벽돌 건물의 외벽에 붙어 있다. 나는 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정체할까, 유림은 그런 고민을 금세 잊는다. 동

행하던 사람은 슬리퍼에 돌이 들어가서 잠시 멈춰 섰고 유

림의 시점에선 그것도 일종의 멀어짐이다. 왜 이럴까, 날이

덥고 별안간 굴뚝이 보인다. 오래전부터 분명 있었을 터. 오

래전부터 분명 있었을 굴뚝이 보이자 굴뚝 옆에 그리고 높

이 붙어 있는 ‘목욕탕’ 세 글자가 보인다. 이 건물은 목욕탕

이었지만


지금은 목욕탕이 아니라는 걸 이제 유림이 안다. 유림은

그 건물의 앞으로도 옆으로도 뒤로도 지나갔었다. 뒤로 돌

아가서 옆으로 비켜서면 공용주차장이 있다. 공용주차장에

는 자갈이 있고 모래가 있다. 비가 오면 모래가 젖어서 모래

먼지가 덜 날린다. 그는 지나가고 지나갔다가도 잊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길을 되짚기도 한다.



앞에서 보면 목욕탕이었지만 지금은 목욕탕이 아닌 건물

은 아주 익숙하고 아주 익숙한 모습으로 종암동의 한 거리

를 이루고 있다.



거기 스시집의 정문이 있어 때때로 불을 밝히거나 밝히지

않는다.



대문을 열고 사람이 나와 고양이를 쫓으려고 막대로 사방

을 두드린다. 그런 것. 그런 사람과 고양이가 있는 지점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얼마간 그들의 일부였다. 나는 부드

럽게 걸어가고 있었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대체로

기분이 괜찮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동행자는 방울꽃을

보아도 방울꽃을 본 것 같지가 않고 넝쿨장미를 보아도 넝

쿨장미를 본 것 같지가 않다. 보아도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나는 부드럽게 걸어가고 있었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대체로

기분이 괜찮았다.


(유림이 나인 것 같고, 내가 유림인 것 같은 지점이 있다. 읽으면서 스며드는 것. 알게 모르게 세상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것. 내가 늘상 다니는 아파트 앞 상가에도 과일가게가 있다가, 치킨집으로 바뀌었다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한다. 제 일이 아니라 큰 관심이 없이 지나치지만, 둘째는 상가를 지도처럼 외우고 있어서 무슨 가게가 생겼고, 없어졌는지를 읊어 댄다. 둘째는 그 사장님이 어디로 갔는지 나보다 더 궁금해서 꼬치꼬치 묻곤 한다. 가끔, 바뀌는 가게들을 들러 본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들에는 잠시 불을 꺼도 괜찮지 않을까. 어디선가 잘 사시기를 스치는 생각으로 가볍게 빌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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