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세실
오늘의 시 한 편 (77).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공통감각
여세실
과천역에 내렸다 우리 서울대공원에 가려고 한 거다
동물원은 닫혀 있었다
철창 위로 올라가면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짐승의 눈인지
깨진 알인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철창 밖의 동물원, 슬픔도 없는 식물원
우리를 열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을
다른 언어로 말해보려고 했다
나 다른 게 될 수 있을까
밀알 하나가 굴러와, 구린내를 풍기며 굴러와, 나를 가로
질러 굴러와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아
우리 모두 비슷한 줄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가 울면 다른 하나가 따라 울고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깃털이 날렸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나면 사라지는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언제나 네 손가락은 축축하고
약속이니까
잘 하자 꼭 하자
같아 보이는 웃음이어도
몇 번이고
다르게 말해볼 수 있는 뒷모습이었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친구가 되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친구 할 수 없게 되니까
첫차를 기다리며
땀을 흘렸다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다다르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했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우리를 열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을
(동물원의 우리를 열어주는 것 자체가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동물원은 나들이 가는 어린이나 사람들이 많지만, 슬픔으로 가득 찬 곳이다. 동물들 입장에서는 말이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공간에서 벗어나 우리에 갇혀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라는 말이 좀 어폐가 있게 느껴진다. 갇힌 곳이 ‘우리’라는 말이다. 동물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대접을 받으며 친구 해 줄까? 동물들이 그렇게 이해심이 넓고 넉넉한 존재들일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