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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의 일

남길순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88).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낮 동안의 일


남길순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배 새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상큼한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의 책들 사이로 퍼지는 오이 향 같은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시원해지는 문장이다. 문학관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많은 것을 배워가는 공간인데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름에 오이 크듯 큰다’는 말이 있다. 아이를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 금세 자랐다는 뜻으로 오이에 빗대어 쓰는 말이다. 오이를 길러 보면 안다. 오전 다르고, 오후 다른 그 크기를 말이다. 저녁에 보고, 아침에 보면 정말 놀라워서 내가 잘못 보았나 싶기도 하다. 그런 귀한 오이를 가져 오는 동호씨가 비에 젖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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