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초등학교 100주년에
귀농하여 농부가 된 지 4년 차가 되었다. 블루베리 수확기라서 하루 서너 시간의 잠만으로 버틴 지 한 달여가 되었다. 날씨가 더워지면 비닐하우스 속에서의 작업이 힘들어진다. 블루베리 열매도 뜨거운 열을 품게 되어 상품성이 떨어진다. 아직 떨치지 못한 잠을 이끌고 농원으로 향하는 차를 운전해 가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나도 모르게 고사성어 한 줄을 되뇌고 있다.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면 어떤 일이라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00초등학교 6학년 2반. 담임이셨던 한학래 선생님께서 알려 주셨던 내 삶의 등대 같은 말이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는 설명도 덧붙여 주셨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하셨던 말씀도 잊히지 않는다. 칠판에 깔끔한 정자체로 글을 써 놓고 삶의 귀한 지침을 알려 주시던 그 마음을 무엇이었을까를 짐작해 본다. 철없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 설명을 해주실 때는 왠지 집중해서 선생님 말씀을 들었던 것 같다.
1980년 52회 졸업생인 우리들은 1학년부터 5학년은 4반까지 있었고, 6학년은 3반까지 있었다. 1반은 신시용 선생님, 2반은 한학래 선생님, 3반은 조일남 선생님이셨다.
한학래 선생님은 광주에서 통근했다. 늘 깔끔한 외모가 성격을 말해 주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으셔서 밴드부를 활성화시켰다. 나는 멜로디언을 맡아서 총 4 열인 악대의 맨 앞에 섰다. 흰색 상하의를 입은 악대의 모습이 그럴싸했을 듯 기억된다.
부드러운 눈길로 우리를 둘러보시던 모습과 함께 잔잔히 웃으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큰 소리 한 번 안 내셨고, 특별히 어떤 아이를 편애하지도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은 한상학(韓相學)이라고 칠판에 쓰셨다. 자기를 “한상학”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해 달라고 했다. 선생님과 제자는 위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배우는 관계라고 했다. 단지, 먼저 태어났을 뿐이므로 서로 배우는 존재가 맞다고 설명하셨다.
6학년은 참 기억에 많이 남는 학년이다. 5·18이 있었고, 선거유세도 학교 운동장에서 있었을 만큼, 많은 인구가 살았다. 1,200여 명이 동시에 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학교의 존폐가 걸릴 정도로 학생수가 부족하다는 현실이 슬프다.
어느 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겠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학교 오는 차 안에서 여대생들을 만났다. 운주사를 간다길래 안내해 주었다.”
선생님 말씀을 듣자 하니, 그 여대생이 편지를 보냈더라는 것이었다. 방과 후에 몇몇 여자 아이들이 교실에 남아 놀다가 머리를 맞댔다.
“선생님 편지를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요지를 그랬다. 부인이 있는 선생님이 여학생한테 편지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닐까. 이런 일은 사모님께 알려 드려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을까?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모님 편이 되어 선생님 서랍을 뒤지는 용감한 행동을 감행했다.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우리는 망을 보는 친구도 정하지 않고, 선생님 서랍을 열어 편지를 읽고 있었다. 우리들 생각과는 달리 수상? 한 말 한마디 없이 운주사를 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편지글을 채 다 읽지도 않았을 때, 교실 앞 문이 열렸다.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도 못 하시고 그 상황을 파악하시느라 얼굴이 벌겋게 변하셨다.
워낙, 성격이 대쪽 같은 분이시라 우리는 큰 벌을 받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조용히 오셔서 편지를 받아 서랍에 넣고는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짧게 말씀하셨다. 잠시 후, 평정심을 찾으신 선생님께서는 책 한 권을 들고 오르간에 앉으셨다. 우리도 금세 앞의 사건을 잊고 삼삼오오 어울려 놀고 있었다.
“누구, 이리 와 봐라.”
우리를 보고 말씀하셨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쭈뼛쭈뼛 선생님의 앉아 계신 오르간 의자 옆에 앉았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나는 선생님께서 오르간에 맞춰 선창 하시는 한 소절씩 따라서 비목이라는 묵직한 노래를 배웠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유일하게 2절까지 알고 있는 가곡이다. 선생님의 음성을 울음이 섞여 있었다. ‘비목’이 무엇인지를, ‘궁노루’가 어떤 것인지 찬찬히 설명해 주셨다. 처음에는 벌 받는 것처럼 마지못해 끌려가 선생님 곁에 앉았지만, 노래를 배우면서 슬픔에 젖어 눈물이 솟았다. 막 큰 사고를 쳤던 아이를 곁에 앉혀 노래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가끔 생각했었다. 채찍대신 당근을 주셨던 선생님은 영원한 나의 스승님으로 남았다. 비목은 내게 슬프고 그리운 한 순간이었고, 그 속에 담긴 역사의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아픈 노래다.
우리가 졸업한 후에도 우리를 보고 싶어 하셨던지, 2년 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면서 중학교로 찾아오셔서 몇몇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눠 주셨다. 그날도 좋은 말씀을 참 많이 해주셨는데, 나는 가슴이 먹먹해서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남자친구와 함께 오라고, 선생님께서 봐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나중에 선생님을 찾아 수소문했지만, 스승 찾기 사이트나 교육청을 통해서도 선생님께서 경기도 교육청으로 소속을 옮기셨다는 소식 말고는 뵙기가 어려웠다. 지금이라도 어느 곳에 선생님께서 살아만 계신다면 열일을 제쳐 놓고 달려갈 수 있겠다.
노래와 함께, 깊은 뜻이 담긴 고사성어와 함께 떠오르는 스승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삶의 고비마다 스승님께서 알려 주신 말씀은 등대가 되어 나를 이끌어 주셨다. 스승님께서도 편안한 곳에서 잘 계시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