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이로 만드는 버터 Farmhouse butter whey butter
버터는 우유에서 분리한 크림으로 만든다. 농장에서 갓 짠 우유를 그릇에 담아 하룻밤 상온에 두면 연한 노란빛을 띠는 지방층이 우유 표면에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크림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크림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손으로 일일이 떠내며 분리했지만 1800년대 후반 스웨덴의 구스타프 드 라발 Gustaf de Laval이 크림 분리기를 발명한 이후로는 대부분 기계를 이용한다. (시중에 판매되는 우유는 입자의 크기를 똑같게 하는 ‘균질화’ 처리를 했기 때문에 우유 표면에 크림이 뜨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거두어낸 크림으로 만들어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유 향 가득한 버터다.
우유에서 크림이 분리되는 과정을 프랑스의 치즈 농장에서 처음으로 봤다. 이른 아침 치즈 제조장으로 옮겨진 우유는 기다란 파이프를 통해 제일 먼저 크림 분리기 Cream Separator를 통과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우유가 지나가도 크림은 고작 졸졸 흐르는 정도로 양동이에 고였다.
그간 어느 나라에서든 치즈 농장에서 직접 만든 버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농장에서는 치즈를 만들기 전 우유에서 크림을 분리해 치즈 속 지방의 양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이 크림으로 만드는 버터는 아침에 짜낸 우유만큼이나 신선한 풍미를 가지는데 그야말로 지역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귀한 로컬 유제품이다.
중세시대에 버터는 귀족들만 즐기는 것이었다. 우유에서 추출할 수 있는 크림의 양이 고작 10%에 불과했기에 크림으로 만드는 버터는 당연히 귀할 수밖에 없었다.
**치즈마다 지방 함량이 다양해 제조 전에 우유에서 크림을 분리해 지방 함량이 높은 치즈의 경우 기존 우유에 크림을 더 첨가했다. 반면 우유 속 지방을 그대로 사용하는 농가에서는 크림을 추출하지 않았다. 치즈 제조용 이외에 남는 우유로 크림을 분리해 버터를 만들거나 요거트를 만들었다.
메리의 집 주방에도 여느 유럽 가정집처럼 네모난 도자기가 놓여 있었고 거기엔 항상 버터가 있었다. 실온에서 눅진해진 버터는 밀크티를 마실 때 빵과 함께 나오거나 요리에 자주 쓰였는데, 치즈 농장을 운영하는 집의 버터는 너무도 당연한 음식이기에 나는 별생각 없이 버터를 먹곤 했다.
어느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메리가 그 당연한 버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농장에서 만들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맛있어요.”
내가 중요한 무언가를 못 알아들었음을 눈치챈 메리가 다시 말했다.
“크림이 아닌 훼이로 만들어요.”
순간 나는 포크를 손에 쥔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훼이로 버터를 만든다고요?”
그녀는 이제 손으로 만든 버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고 나는 여전히 놀란 눈을 한 채 감탄사를 쏟아냈다.
메리의 농장에서는 일주일에 단 하루, 목요일 오전에 버터를 만든다. 치즈 제조장 한쪽에는 통유리창을 통해 안이 훤히 보이는 작은 방이 있는데 아침 일찍 나와서 체더치즈 제조 과정을 지켜보는 사이사이 나는 그 작은 방을 계속 살폈다. 이윽고 버터 제조를 담당하는 린드 아주머니가 제조장으로 들어서며 내게 손짓으로 이제 시작한다고 했다.
냉장실만큼이나 서늘한 냉기가 도는 버터 제조실에는 이미 훼이에서 분리한 크림이 철제 우유통(만화영화〈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바로 그 우유통이었다)에 담겨 있었다. 버터 만드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뿐인 이유가 있었다. 훼이에서 나오는 크림의 양은 너무나도 미미해 일주일 내내 치즈를 만들며 나오는 수십 톤의 훼이에서 겨우 한, 두 통의 크림만 분리할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우유에서조차 10분의 1도 추출되지 않는 크림을 한가득 모아야만 겨우 한 덩이밖에 못 만드는 버터를 지방도 단백질도 대부분 빠져나간 훼이로 만든다니, 정말이지 감탄스러운 버터였던 게다.
작업이 바로 시작되었다. 크림은 드럼처럼 둥근 버터 처닝Churning 기계에 부어졌고(Churn은 ‘우유·크림을 휘저어 버터를 만든다’는 뜻이다), 여기에 찬물(7℃)을 크림 양의 반만큼 넣었다.
“물은 크림 속 지방을 뭉쳐지게 해요. 대신 물 온도가 이렇게 차가워야 하죠.”
처닝 기계에서 찬물과 함께 30분간 회전한 크림은 처음에는 구슬처럼 작은 알갱이로, 나중에는 찰진 밀가루 반죽처럼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졌다.
린드 아주머니는 처닝 기계 속 물을 배수로로 빼내면서 새로운 찬물을 계속 부어 넣었다. 크림 속 지방이 이미 다 뭉쳐서 버터가 됐는데 왜 계속 물을 붓고 빼내는 작업을 반복하는지 묻자 린드 아주머니는 배수로로 빠져나가는 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뿌옇죠? 저 물이 맑아질 때까지 반복해야 해요. 찬물은 처음에는 크림 속 지방을 응고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이후부터는 뭉쳐진 버터를 세척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정말이지 처음 배수할 때와 달리 네 번째로 배수할 때의 물 색깔은 확연히 맑았다. 이 작업은 서너 번 정도 반복하는데 흘러나오는 물의 색깔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 횟수가 정해져 있지는 않단다.
마지막 배수가 끝나자 버터는 젤라토처럼 쫀쫀한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가염 버터일 경우에는 이때 버터 무게의 1.2%의 소금을 넣어 섞어준다. 린드 아주머니는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라고 했다.
“서둘러야 해요. 실온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버터 조직이 풀어져 녹아버리거든요.”
과연, 다음 작업들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먼저 버터를 저울에 올려 250g씩 나눈 다음(판매용 단위다), 이 울퉁불퉁한 버터 반죽을 나무 주걱으로 찰싹찰싹 소리가 나게 쳐서 평평하게 편다. 그러고는 나무 주걱 두 개를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모양을 다듬은 후 끝부분을 살짝 들어 올려 둘둘 말면 한 뼘 너비의 원통형 버터가 완성된다.
방 안의 찬 공기와 7℃의 차가운 물에 단단하게 굳은 버터를 만지는 린드 아주머니의 손은 이미 벌겋게 얼어있었다. 급하다는 아주머니를 도와 버터를 투명한 용지로 포장하는 마무리 작업을 했다. 그새 조금이라도 녹을까 봐, 포장된 버터는 박스에 담겨 작업장 안의 냉장고로 서둘러 옮겨졌다.
손이 바쁜 아주머니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나는 바라보기만 했던 버터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무 도마 위에 놓인 버터를 주걱으로 찰싹찰싹 때려 평평하게 만드는데, 옆에서 볼 때와 달리 물이 얼굴로 자꾸 튀었다.
“버터를 주걱으로 내리치는 건 모양을 잡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버터 속에 남아 있는 물기를 빼내 질감을 더 차지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찰싹찰싹 힘 있게 버터를 내리치는 거죠.”
체온에 버터가 녹을까 봐 손이 아닌 나무주걱(wood paddle 우드 패들이라고 부른다.)을 사용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 작업 하나 이유 없이 진행되는 건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상온에 있던 버터 덩어리들이 도마 위에 녹아 붙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사진 찍는 걸 멈추고 아예 작업자로 나서 일을 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손에 의해 찰지게 수분이 빠져나간 주걱 자국 선명한 버터는, 린드 아주머니가 내 몫이라며 선물로 건네주었다.
오랜 전통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는 수제 버터. 과거에는 농가의 소득원이었지만 지금은 전통이 잊힐지 모른다는 염려 속에 겨우 만들어지는 버터. 퀵스의 훼이버터는 250g에 2.9파운드(약 4,500원)라는 가격에 팔리기에는 정말이지 아까운 전통이었다.
훼이버터의 의미
훼이whey는 우리말로 유청(乳:젖 유 淸:맑을 청), 즉 맑은 우윳물로 불리는데 치즈를 만드는 초기 과정 중, 우유 속에 산 acid을 넣어 우유를 두부처럼 응고시킨 후 이 덩어리들을 건져내면 남게 되는 액체다.
농장에선 미미하나마 우유의 영양분을 갖고 있는 훼이에 사료를 섞어 돼지 등의 가축에게 먹이로 주거나 혹은 다시 끓여 그 유명한 리코타 Ricotta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이탈리아가 원산지인 이 치즈는 이름 그대로 Re-cook, 즉 다시 조리해 만드는 치즈로 유명한데, 훼이의 용도는 이렇게 치즈를 만들거나 가축의 먹이에 사용되는 한정적 용도로만 쓰였다. 최소한 내가 만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의 치즈 농가들에서는 말이다.
훼이 버터는 영국 남서부 지역의 전통 버터다. 일반적인 크림 버터와 달리 치즈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로 만들기에 버터에서 치즈의 풍미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치즈는 종류에 따라 제조 시 사용하는 균이 다양하고, 우유에 가열하는 열 또한 다르고, 우유가 응고된 상태에서 훼이를 빼내는 시간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연성 치즈의 경우 커드를 크게 잘라 훼이를 조금만 빼내고 경성 치즈는 커드를 작게 잘라 훼이를 최대한 커드 밖으로 빼낸다. 어떤 치즈들은 훼이가 커드에서 서서히 빠져나가게 하룻밤 동안 제조실 탱크에 커드를 두지만 어떤 치즈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커드를 건져내 훼이와 분리를 한다. 훼이는 상온에 있는 시간이 길수록 치즈 제조 과정 중 넣은 균에 의해 조금씩 발효를 하기에 어느 종류의 치즈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성된 훼이인지에 따라 그 풍미가 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