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기억하다
10월 9일 장례를 치르고 말일까지 쉬었다. 그리고 11월 한 달간 코스를 하고 12월이 되어서도 1월 미국 코스 준비하느라 정신을 모았더니 1월 코스에 다녀와서 와르르 감정이 쏟아졌다. 1월의 절반은 미국에서 잘 보내고 절반은 서울에서 자가 격리되어 있었다.
1월 첫 코스를 도우러 요며칠 몸을 움직이니 집안팍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과 짐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머지 않아 입춘이니 매일 버릴것들 살펴야겠다 싶었다. 오늘은 카페를 새로 연 친구를 위해 책을 좀 줘야겠다며 정리하다보니 아빠 집에서 가져온 작은 책한권이 눈에 띄었다.
<월간 정여울> 11 토닥토닥 당신의 굽은 등을 쓸어내리며 라는 제목이었는데 책의 첫장을 여는 순간 와르르 마음이 쏟아진다. 토닥토닥, 당신의 손바닥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 아 아빠...조그맣게 속삭였다.
내게 남아 있는 아빠의 흔적이 몇 개 없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11월 아봐타 코스 한 달 내내 거의 모든 연습에서 아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더니만 손바닥만큼 작은 책안에 나오는 몇글자가 천금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아빠는 시공간 어디에도 존재감이 상당하다.
5월에 아버지를 모셔오면서 아빠 머리맡의 책 몇권을 함께 들고 왔는데 '어 이런 책은 아빠가 왜 샀을까?'했다. 마치 나를 읽으라는듯 그 책이 내게 온 듯 보였다. 그후 방 한 구석에 있다가 2월 3일에서야 책을 들춰본다.
당시 정읍 집에는 새책이 몇권이 있었는데 아빠는 읍에서 나오는 문화바우처로 책을 사서보시고는 뉴스에서 본 신간 중 사고 싶은 책도 몇권 메모해 놓으셨더랬다. 아빠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감사했다.
어릴 때 신성중고 근처에 진명서점이라는 책방이 있었다. 아빠랑 매달 그곳에 가서 신동아를 사오거나 읽을 책을 몇권 가지고 오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 책을 사면 반드시 반질한 포장지로 책 옷을 입혀주곤 했다. 그 방법을 눈여겨보았다가 교과서를 받으면 달력이든 포장지든, 비닐이든 책옷을 입혀주곤 했다. 서점, 책, 도서관 나의 어린 시절 문화를 경험하게 하던 공간들이 떠오른다.
지난 5월 아빠와 정읍에서 만나던 날도 서점에 들렀었다. 그 서점에서 사오셨을 책이겠지. 온라인 서점은 이용할 줄도 모르셨을테니까. 정여울이라는 작가를 몰랐는데 작은 책에서 뿜어나오는 필력이 대단하다. 게다가 주제도 위로다. 마치 숨은 장치처럼 나타나서 내 등을 쓸어내려 주는 것만 같다. 고맙다.
가끔 생각을 한다. 나도 엄청난 필력으로 작지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질투와 게으름이 필력보다 기승을 부려 조금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ㅎㅎㅎ. 모처럼 글을 쓰게 만든 아빠, 정여울 작가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