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력을 가진다는 게 도대체 뭐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들에 자신감을 가지고 버틴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러면 기억이란 무엇인가? 추억들에 대한 자신감 아니겠는가. 냉철함은? 위험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자신감. 용기는 특정 행동이 나오게 되는 자신감. 인내는 갈망에 대한 자신감, 깍듯함 또한 특정 제스처와 동작들을 그런 식으로 다듬는 일종의 자신감 아니겠는가."
오노레 드 발자크 <빚 갚는 기술>
그를 떠올리면 도자기처럼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가느다랗고 가지런한 속눈썹이 떠오른다. 그녀는 발 디딜 틈 없을만큼 소주병, 라면 봉지 따위가 버려져 있는 곳에 살고 있었다. 친구는 스스럼없이 나를 그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그녀를 지키는 문지기인지, 키우는 짐승일지 싶게 늘 같은 모습으로 비스듬히 늘어진 아버지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다. 발날을 세워 쓰레기장 같은 곳을 지나 작은 문고리를 틀면, 이질적일 만큼 하얗게 반짝이는 그녀의 방이 있었다.
우리는 그 방에서 여느 소녀들처럼 다이어리를 꾸미거나, 각자 소설을 읽었다. 인디밴드의 음악을 좋아해 라디오에 테이프를 넣고는 '유쾌한 씨의 껌 씹는 방법'같은 노래를 함께 목놓아 부르곤 했다. 엄마를 일찍 여읜 친구가 기댈 곳이라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하나였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친구 닮은 꽃을 선물하기를 좋아했다. 여느 날처럼 그녀의 함박웃음을 기대하며 꽃 한 송이를 등 뒤에 숨기고 벨을 눌렀다. 분명 집에서 함께 놀기로 했는데, 여러 번 초인종을 누르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현관문 옆 친구의 방 창문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귀를 가져다 대도,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께가 서늘해지며 두려움이 엄습했다. 문에 기대 차가운 바닥에 앉아 기다리다가, 가만히 꽃을 내려두고 죄수처럼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며칠 동안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연히 길에 만난 친구의 낯빛은 유리처럼 창백해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얼어붙은 나를 투명 인간 대하듯 지나쳐 버렸다. 그렇게 가버리는가 싶더니 문득 가만 서 있는 내등 뒤에 대고 "민혜야, 나 괜찮아"라고 말했고 그 길 위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작은 그녀가 끌어안은 상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있는데 왜인지 우리는 헤어진 연인처럼 어색하고 뻣뻣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천애고아가 된 그녀가 내 앞에서조차 눈물을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그 인생 앞에 꾸며대는 나의 불행들이 작아지는 게 싫었던 걸까? 핑계가 분명하지만 당시 어린 나는 그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어라고 공감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후로 10여 년이 흘렀고 고아원에 자원봉사를 다니는 어느 날이었다. 원장님이 커피 한 잔을 내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저, 선생님. 혹시라도 언젠가 못 오시게 되면 꼭 연락 주세요. 정을 주다가 갑자기 안 오시면 아이들이 더 힘들어하거든요." 나는 그러마고 원장님의 따뜻한 눈을 바라보다, 불쑥 그녀의 기다랗고 가녀린 속눈썹이 떠올랐다. 그때 그를 붙들고 실컷 울어줄 걸, 세상을 향해 욕지거리라도 함께 내뱉을 걸. 그녀는 작은 몸으로, 그 가느다란 속눈썹으로 삶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고아원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다. 등 뒤에서 괜찮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에 숨은 붉은 눈시울처럼, 아프게 물든 하늘이 한눈에 들어와 앓는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