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사탕

줄다리기

by 하민혜

스마트폰은 획기적인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시시때때로 많은 사람들과 연결이 가능한 이런 시대에 우리는 왜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수많은 정보를 빠르게 검색할 수 있음에도 왜 더 고립된 느낌이 드는 걸까.


김영하 작가는 인터넷상에 '여행'을 검색했을 때 언제나 끝나지 않은 (찜찜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종이책은 여행의 시작과 끝이 있지만, 인터넷으로 보면 끝이 끝인게 아닌 것만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대로 주어진 정보를 마주하면 도리어 만족이 어려운지 모른다. 그런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내 옆에 가족들과 이웃들만 신경 써도 되던 시절에 우리는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고, 지금보다 만족감을 느꼈을 것만 같다.

SNS 덕에 사람들은 수시로 연결된다. 카톡 무음을 해놓은 지 오래지만 온갖 단톡방과 개인 톡들, 각종 플랫폼 알림은 끊임이 없다. 다발로 조각난 우리의 신경들은 오만데 흩어져 인터넷상에 떠돌고 있다. 가만 보면, 외로울 새가 없어야 맞는데 어째서 우리는 더 우울하고 철저히 혼자임을 느끼는 것일까.

초등학생 자녀 둘을 키우고 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지만 그들도 외롭거나 우울감을 느낀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런 때에 나는 옆에 있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때로 맛있는 간식이나 재밌는 장난감, 혹은 게임 등을 마음껏 허용하는 이유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그것밖에 없어서인 것 같다. 그러다 문득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면 난감해지곤 한다.




며칠 전 아이들과 '사랑'과 '사탕'에 대해 토론했다.

아기가 사탕을 원하고, 사탕을 뺏으면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는 아기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사탕을 계속 줘야 하는 걸까, 어느 선에서 뺏어야 하는 걸까? 아이들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나는 끝없이 질문했다. 아기를 위해서 사탕을 뺏어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아기가 먹고 싶은데 왜 먹으면 안되는지를 따져 묻는다면? 그건 너를 위해서라고 이야기해도, 그 사탕 때문에 악다구니를 쓰고 참으로 괴로워한다면? 물론, 원하는 만큼 사탕을 허용해선 안된다는 답이 나올 수 밖에 없음을 몰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시점까지는 허용하고, 어느 선부터 불허해야 하는지를 토론했다.


엄마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자녀들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아이들에게 허용과 통제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때가 있다. 8살, 9살이 된 아이들이지만 그 점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눈다. 이는 비단 아이들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같은 고민을 한다. 게으르고 싶을 때 얼마만큼 게을러야 하는지, 몸에 해로운 걸 알면서 먹을 때에는 얼마만큼 허용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지를 고민한다.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오리무중이다. 그저 뭐든지 '적절히' 한다는 답에 만족할 뿐이다. 허용에 대한 이야기에서 강박으로 슬며시 넘어가 보려 한다. 강박이 허용의 반대말은 아니지만, 스스로 어떤 점을 (불편하게도) 넘어가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때로 정리 정돈에 대한 강박이 있거나, 청결에 대한 강박이 있는 사람을 종종 마주한다. 되도록 아무렇게나 열심히 살고 있는 나에겐 강박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 것이 하나 즘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철학자 칸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약간의 강박이 있음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들을 재우면서 주로 잠자리에 드는 편인데, 잠이 오지 않는다 해도 다음날을 위해 잠을 이루려 한다. 되도록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하는데, 때로 친구가 놀러 오거나 여행을 가더라도 일찍이 잠드는 것을 고수한다. 티내지 않고 이 규칙을 엄수하고 있는데, 어쩌다 망가지기라도 해서 다음날 하루가 뭉개지는 것을 언짢아 한다.


만일 일 년에 한두 번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있다면, 그다음 날 하루가 열이면 열, 성에 차지 않는다. 이것은 성취와 관련되어 있진 않다. 종일 무엇을 했건 상관없이 그런 날엔 맑은 정신이지 못하고 퍼지는 몸은 말할 것도 없다. 무거운 몸, 늘어진 정신으로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 영 마뜩지 않다. 20대에 어쩌면 날라리(?)생활을 하던 때에도 평균 수면시간을 지키거나 규칙적인 하루에 강박을 가졌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강박인 걸까? 또는 괴롭히는 걸까?


때로 어릴 적 되지도 않게 작성했던 방학 생활 계획표처럼 나를 키워가는 상상을 한다. 어린 때 했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처럼 내게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채워나가고 알뜰살뜰 레벨업하며 살고 싶다. 언젠가 끝이 있을 우리의 인생은 꼭 책 한 권과 닮았기에, 주어진 한 페이지를 알차게 채워가는 상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람과 달리, 나는 나를 그리고 아이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불필요하게 허용하곤 한다. 해가 될 줄 알면서, 결괏값이 뻔히 보이는데도 내버려 두는 때가 제법 있다. 내가 갖는 규칙에 대한 강박은 아침의 맑은 정신 그리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값들에 대해서만이다. 그 외에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때가 있다. 그런고로 억압과 허용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일은 일상 다반사이다.

주변에 아가씨인 친구가 제법 있다. 내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 때문에 결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 나이에 싱글이라면 나 역시 그럴 것 같다.) 자녀 양육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를 넘어서, 존재에 대한 즉 사랑에 대한 무게 때문이다. 그 무게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일찍 결혼한 나는 별 수 없이 자녀를 사랑하는 법을 고심하며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우리에게 사랑은 어쩌면 전부이지만, 제대로 사랑하기란 여간 고민스럽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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