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의 시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쓰려고 읽습니다>를 읽고 있습니다.

by 하민혜

외출 전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었다. <부제는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이다.>

지난 한 주 동안 카메론이 말하는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를 실행했다. 부러 12주 과제를 실제처럼 해내기 위해 천천히 읽어 나가고 있는데, 오늘이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 날로 딱 1주일이다. 2주 차 과제가 주어지는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번주 해나갈 과제들을 노트에 정리하고 나니 설레는 느낌이 들었다. 줄리아 카메론은 최근 만난 그 어떤 저자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녀의 글은 참탄해 마지않을 만큼 설득력 있고 단단했다. 주어지는 과제를 하며 글을 곱씹는 기간이 꼭 12주가 걸리리라. 그녀가 주는 깊은 경험을 온전히 체득하고자 숨을 깊게 들이쉰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남편의 형이 결혼한 베트남 여자를 처음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다. 반갑고 설레지만, 나보다 15살이나 어린 형님이라는 게 새삼스러워 미리 비교당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여자는 나이에 예민하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이해하고 있으니 이제 나도 나이가 든 모양이다.


머리를 하고 콧물처럼 흐르는 로션을 덕지덕지 바른 후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음.. 조금 진한가?'

후줄근한 티셔츠에 펄럭이는 바지를 입은 남편을 다시 옷방으로 들여보냈다.


"오빠~ 그래도 처음 뵙는데, 형 체면도 생각해야지~"

"에이 무슨.... 그럼 뭐~ 갖춰 입어?"

"정장을 입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얌전한 가로무늬 니트에 청바지를 입었다. 머리가 산발이다. 말린다고 말렸는데, 미용실을 가지 않은지 오래라 어딘가 늘 어수선하다. 서랍을 열고 아이의 머리 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묶을 거라면 괜히 머리를 감았네.' 잠시 스쳐간 생각이지만 본래 씻는 것을 싫어하진 않는다. 도리어 샤워를 너무 좋아해서 "너는 네 살을 다 벗겨낼 생각이니?"하고 엄마에게 늘 핀잔을 들었었다. 나는 늘어진 양말 하나 치우지 않으면서 지 몸 하나만큼은 끔찍이 깔끔 떤다고 욕을 듣던 아빠를 꼭 닮았다. 어느덧 연년생 아이둘을 키우는 엄마가 된 후로는 시간을 금처럼 여기는 아줌마가 되버렸다. 머리를 감는 건 금방이지만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는 20분이 아깝다.


준비가 끝나 가자고 말하는데 아들이 택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서평단으로부터 받은 이정훈 님의 '쓰려고 읽습니다'였다. 다같이 외출하려고 현관문 앞에 있으면 한 아이가 화장실로 달려간다. 다른 한 아이는 불현듯 나가기 직전에 무언갈 먹거나, 핸드폰을 만지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렇게 5분이 그냥 흘러가는 일이 많다. 10분이 걸려도 좋다는 마음으로 현관문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이정훈 작가님의 책은 세번째 만남이다. 그가 출간한 책이 모두 몇 권인지는 모르겠다. 자랑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일이 잘 없다. 글은 역시나 술술 읽혀내려갔다. 작가는 자신만의 명확한 한 줄 없이 무자비한 독서를 지향하는 이들과 방향성 없는 자기 계발을 비판하고 있었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이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책에 파묻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쿡쿡 찔리기도 했다. 일편으로는 과연 그런 노력마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매도한다면 한발 짝 내딛을 수 있긴 할까 싶기도 하다. 자신만의 명확한 인생 방향과 한 줄을 만들기 위해 '쓸모없는' 다독과 자기 계발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고, 시류에 휩쓸려가지 말라는 의미이다. 다독이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진정한 독서의 의미를 꼬집는 것이다.






아주버니 옆에 다소곳이 서있는 베트남 아가씨는 빨갛게 물들은 머리를 높이 묶은 채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훌쩍 큰 키로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형님"이라고 인사했다. 내 미소를 따라 조금 더 환히 웃는 얼굴에서 앳된 아이 같은 모습이 보인다. 아마 20대 초반엔 나 역시 노상 그런 표정을 지어 그런지 낯설지 않다.


사교성이 넘치고 발랄한 딸 덕에 식사 시간은 즐겁고 화기애애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는데

바로 지금, 이 글귀를 만났다.


"매일 일기를 쓰거나, 다이어리를 작성하는 사람에게는 살아있음의 감각을 잃지 않는 비범함이 있습니다. 쓴다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언어를 찾는 일이어서 그 과정에서 만나지 못한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이라고 가정한 문장으로 글을 써봅시다. 죽음을 경험한 적 없으니 실은 현실의 삶에 관해서 쓰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당신의 가장 선명한 현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당신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열 가지를 적어봅시다. 가령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고 하고 그중 매일 한 가지를 삶에서 찢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삶을 지탱해 온 소중한 가치들이 당장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날 겁니다."

이정훈 <쓰려고 읽습니다>38p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가 아니더라도, 경제 책을 읽거나, 청소 책을 읽든 꼭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 글에 작가가 무언갈 해보라고 권하면 그 자리에서 글 읽기를 멈추고 행동을 하거나, 최소한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적는 것이다. 당장 더 읽어 내려가고 싶은 욕구가 앞설 때도 있지만 이것만큼은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다. 시간이 늦어 아이들 씻는 것을 도와야겠지만 이정훈 작가님이 이야기한 글을 서둘러 적어두려 한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무엇보다 나의 죽음을 애도할 사랑하는 가족들이 떠오른다. 황망할 그들의 가슴을 생각하면 목에 고구마가 걸린듯 먹먹하고 이내 눈이 시큰해진다. 특히나 어린 아이들은 존재감이 클 엄마의 부재가 얼마나 두려울까. 내가 지금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아이들일 것이다. 최소한 아이들이 크는 동안만큼은 따뜻한 엄마의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적셔주고 싶다. 세상에 나아가 때로 막막하거나 넘어지고 상처받아 아파하는 일을 막을 순 없다. 자라는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따뜻하고 촉촉한 사랑을 물려준다면, 때로 차갑고 메마를 적에 힘이 되지 않을까 해서다. 아직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내어주어야 할 것이 남아 조금 더 생이 허락된지 모른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열 가지는 사랑, 가족, 신의, 자유, 성장, 배움, 지혜, 기여, 책임, 영성이다.

만일 살며 추구하는 가치가 변한다면 그건 내가 변해서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정의 내리는 소중한 것들이 전부라 믿지 않고 나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시간이 소중함을 아는 것은 그 유한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 그리고 당신의 시간은 바로 생명이고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긴다. 죽음이 내일이라면 일 년 후라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금세 삶의 목적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고故이어령 선생은 사는 동안 죽음을 덮어두지 말라셨다. 만일 애써 살아간다면 그는 시간의 유한함을 모르는 것이다. 고통이든 고됨이든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음을 깊이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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