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기
20년간의 직장 생활을 정지하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첫 두어 달은 제주 생활에 적응하느라, 아이들 학교생활 적응을 돕느라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일상을 채웠던 회사 일이 없어지니, 대신 집 안 청소를 To-Do 리스트에 넣어 관리하고, 남편이 설거지를 좀 도와주려 하면, 내 일을 빼앗기는가 싶어 괜스레 손사래를 쳤다.
맞벌이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수입에 맞춰 소비 패턴을 바꾸어야만 했는데, 어두웠던 한국 물정에 눈을 뜨면서 시금치 한 단, 사과 몇 알이 일상의 고민이 되었다. 장을 보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고, 주유를 하면서도 ‘어이쿠’ 한탄이 앞질렀다.
자동이체처럼 통장에 꼬박꼬박 숫자를 찍어주었던 ‘나의 월급’이 없으니, 어깨가 움츠러드는 건 당연한 걸까.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들은 구매 버튼을 넘어서지 못한 채 그득히 쌓이다 하나 둘 삭제를 당하기 시작했고, 내 물건을 사는 건 남편에게 미안함 마저 들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내 자존심마저 고개를 숙이게 될까 두려워 재테크 관련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다들 어찌나 쉽게 말하고 쉽게 돈을 버는지 한 권, 두 권, 열 권…. 읽은 책이 옆에 쌓이면 쌓일수록 마음의 짐도 함께 쌓였다. 급기야 ‘월급쟁이 부자들’의 아파트 재테크 강의 하나를 수강하게 되었는데, 밤낮 주말을 가리지 않고, 서울에서 지방 - 지방에서 서울을 오가며 발에 땀이 나게 임장 하러 다니는 열정적인 님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혼자 숨만 헐떡였던 기억이 난다.
직장이 없으니, 아이들 양육에라도 내 존재감과 성취감을 발휘해 보자며 훈육을 핑계로 간섭을 일삼았고, 결국 돌아오는 건 내 자신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사실, 아이들은 그동안 참 잘 커왔다. 놓친 학교 준비물 한 번 가져다준 적 없는 바쁜 회사 엄마를 탓하기는커녕, 스스로 잘 챙기는 자립심 강한 아이들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네 인생이나 잘 살아라!
생각해 보니, 난 직장을 그만둔 지 이제 갓 석 달이 넘은 백수. 그동안 수고했다, 애썼다 나를 다독이고 칭찬할 여유조차 건너뛴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어딘 가에 묶어 두고 싶었을까. 가속력이 떨어져 행여나 다시는 시동이 안 걸리는 폐차가 될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을 소홀히만 대하였던 건 아닐지…
유독 추웠던 겨울, 두텁게 신은 양말을 꼼지락거리며,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쬐며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 소복이 눈이 쌓인 귤나무 사이로 노란 얼굴을 빼꼼히 내미는 노지 귤. 갓 주차된 보닛 위에 올라가 잠시 추위를 녹이는 길고양이 한 마리. 그렇게 나의 추운 겨울은 그간 지나쳤던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무거웠던 짐을 서서히 내려놓고, 나를 비우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녹아내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인지, 이 순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사냥하며 홀로 웃음 짓고, 슬퍼하고, 통쾌해했다.
기다리는 봄에는 어떤 나를 만나게 될까, 어떤 나를 만날 수 있을까…. 무언가를 처리하고 지워내는 것에 급급한 내가 아닌 자그마한 것이라도 조금씩 넓혀가는 나의 모습이길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