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도시 여행의 명분
밖에 나가야 할 명문으로 도쿄 인사이트 여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6일째. 오늘은 도쿄를 잠시 벗어나 슬램덩크 덕후들의 성지로 불리는 가마쿠라를 방문하기로 했다. 사실 여행을 계획할 때 가마쿠라는 나의 후보군에 없었다. 슬램덩크의 오프닝에서 나온 장면이 다 일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마쿠라를 출장 차 한 달 전에 미리 다녀온 와이프가 슬램덩크 포토스팟 외에도 매력이 있는 소도시라며 마케터라면 꼭 한번 가봐야 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와이프의 말은 틀린 적이 없기 때문에 믿고 스케줄에 넣었다)
아무튼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신주쿠로 도착해 오다큐선에 몸을 싣었다. 신주쿠에서 가마쿠라까지는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데, 왕복으로 3시간이 넘으니 생각보다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오다큐선을 타고 이동할 때에는 평소 여행과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후지사와역에 도착해 에노시마 덴테쓰선을 타는 순간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슬램덩크 애니메이션 속에 나온 그 노면전차인데, 그것을 보고 타는 것만으로 마치 애니메이션 세트장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렇게 영감을 받으며 내가 내린 역은 포토스팟으로 유명한 가마쿠라코코마엔역이 아닌 바로 직전 고시고에역이었다.
고시고에역에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이곳은 한 정거장 차이지만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에서 내리니 바로 주택들이 나오고 철길을 지나가야 도보로 걸을 수 있는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걷다 보니 가마쿠라로 온 첫 번째 이유, 시라스 전문 식당이 보였다. 시라스는 멸치새끼처럼 생긴 아주 작은 생선으로 가마쿠라 바로 옆 동네(?) 에노시마의 명물이다. (지리상 작은 차이가 있으나 관광객에게는 에노시마와 가마쿠라를 같은 지역으로 소개된다) 시라스는 이 지역의 특산물이긴 하지만 도쿄 등 동일본 지역까지 납품되긴 한다. 그래서일까 특이한 식감과 생김새로 꽤 유명세를 탄 탓인지 일본인들 사이에선 이 시라스를 먹기 위해 가마쿠라를 방문한다고 한다. 이 작은 생선이 얼마나 특별하길래, 여기까지 찾아올까? 수많은 식당들 중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소문이 난 '시라스동'이라는 식당에서 시라스 요리가 모두 담긴 한상차림을 시켜보았다. 튀김부터 조림, 볶음, 회까지 다양하게 나왔는데, 조리 방법에 따라 다른 식감과 다른 맛을 냈다. 가격대가 꽤 있었지만 훌륭한 한상이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좀 걷기로 했다. 가마쿠라의 도보는 노면전차와 해변 사이에 있는데, 이것 또한 매력이 넘쳤다. 내가 걷는 방향에서 오른쪽에는 파도와 서퍼들의 모습이, 왼쪽에는 종종 지나가는 덴테쓰선 열차가 낯설지만 매력적인 풍경을 자아냈고 게다가 작은 틈새에 자리 잡은 카페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나는 작은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이층으로 되어있는 이 카페에선 바다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함께 볼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지하철과 같은 오타큐선을 타고 도쿄에서 불과 1시간 30분 만에 제주도와 같은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와 같은 교통 인프라 때문인지 가마쿠라는 도쿄인들이 바다에서 힐링을 하고 서퍼를 즐기는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실제로 가마쿠라는 에어비앤비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꽤 많고, 집집마다 서핑보드를 정비할 수 있는 공간과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낼 수 있는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카페에서 밖을 내다볼 때 서핑보드를 들고 가거나 정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카페에서 목을 축인 후 다시 나는 가마쿠라의 메인 스팟, 가마쿠라코코마엔역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순간에도 덴테쓰선 열차는 여러 번 내 옆을 지나갔고, 슬램덩크에 나온 그 장소와 유사한 골목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러한 모습이 더욱 낯설면서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덴테쓰선 열차가 일반 가정집과 공동묘지 바로 옆을 지나는 것이었다. 실제로 몇몇 집에 들어가기 위해선 덴테쓰선 철도를 건너가야 하는 구조였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일본인들에게 열차는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왜 열차에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있었다.
가마쿠라코코마엔역에 도착하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슬램덩크의 그 장면을 따라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덴테쓰선 '에노덴'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가마쿠라 구석구석을 즐기고 기분 좋은 추억을 갖고 갈 수 있는 이유도 덴테쓰선 덕분일 것이다. 이러한 인사이트를 볼 때 우리나라 구석구석 좋은 곳이 많지만 여전히 관광을 활성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철도 인프라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차로 갈 수 있지만 그 한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소수로 이동이 가능하고, 운전자의 희생과 불편함이 따른다. 그리고 주차 등의 불편 요소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더 늦기 전에 소도시 열차 인프라가 확장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