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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작업실 Oct 08. 2024

때로는 무심한 하루

생각보다 길고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가을이라 찾아온 서늘함은 달리기를 하다 멈춰 선 쉼처럼 느껴진다. 일상에 뭔가 의미 있는 '목적'으로 가득 찬 하루는 삶이 가득 찬 느낌이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공백을 만들고 무심하게 이미 가진 것들을 보살피는 삶도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느낀다. 그 또한 삶이 가득 찰 수 있게 도와준 시간이 된다.


우리 가족은 최근에 여름에 아쉬워했던 해외여행을 짧게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 식구들이 같이 출발하는 게 아니라 남편과 나는 각자 다른 도시에 있어서 나와 아이, 남편이 함께 만나서 공항까지 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최대한 짐을 줄여서 갔다. 가까운 곳에 갔지만 그래도 날씨가 달랐고 계속해서 내가 가진 짐과 예산, 얼마나 내가 들고 이동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봐야 했다. 열심히 놀았지만 그만큼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 와본 해외여행은 나에게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 줬다.

그리고 저절로 20대 때 엄청 해외여행에 목말랐던 내가 떠올랐다. 지금의 내가 여행을 가는 목적과 그때의 내가 여행을 가는 목적은 달랐다. 20대 때는 서울에 자취를 하면서 살았고 자취생의 삶은 원룸 작은 집과 같이 자존감이 쪼그라들어있었다. 그때는 사회초년생답게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아서 그냥 그런 척하는 삶이라도 걸쳐보고 싶었다. 해외여행이 모두에게 사치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교육의 장일수도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의 터전일 수도 있으나 내게는 사치의 영역이었다. 이미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은 이방인으로서 서울살이를 하는 나로서는 충분히 채워지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탐험하고 싶은 욕구로서의 해방감보다 그저 있어 보이는 느낌을 가지고 싶었다. 해외여행의 경험도 궁금했지만 보다 세련된 느낌을 갖고 싶어 했고 면세점에서도 겨우 살법한 명품이 일상인 양 같이 찍힌 내가 보고 싶었다. 20대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20대는 참 초라하고 안달복달했던 작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40대가 되고 나서의 해외여행은 확실히 달랐다. 나를 위한 여행은 아니었고 뭔가 있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가려는 곳은 여기보다 조금 더운 곳이어서 낡았지만 발이 편했던 오래된 샌들과 운동화를 챙겼다. 새로 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마음은 금방 접혔다. 이번 여행이 관광하고 많이 보러 다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깨닫고 마음에 담기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달라져 있음을 깨달은 게 컸다.


먼저 예전처럼 뭐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있었고 면세점에 갈 필요를 못 느꼈다. 이미 집에 있는 물품이 머릿속에 자리 잡혀있었고 무리하게 더 담고 싶은 마음도 무리해서 더 먹어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남편이라는 인솔자도 있었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인솔자가 돼서 집으로 아이를 무사히 데려가려면 내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다. 아침 조식 뷔페에서도 필요한 만큼만 먹게 됐고 필요 이상의 선물도 사지 않았다. 가면서 쓰라고 받았던 용돈도 많이 남아 다시 통장에 넣어뒀다. 수많은 매혹적인 관광상품이 걸려있었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함부로 덥석 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신중했다기보다 사고 싶지 않았다는 게 내 마음이었다. 호텔에 가면 불필요한 일회용품의 어메니티를 가져오곤 했는데 그것도 일부는 두고 오고 필요하지 않은 한 깨끗하게 두고 소비하지 않았다.


어느덧 내 기억 속에 찬란했던 20대의 전유물, 20대의 가치로웠던 것들, 그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중 다시 해보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40대가 되면서 또 한 번 정리되고 리셋이 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비일상적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왔다.


내게 더 이상 매력적인 이미지나 음악이 들리지 않아도 일상에 숨어있는 조용한 소음이 나를 더 채우는 것을 느낀다. 집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고 소담한 내 작은 정원의 잎사귀들이 조용히 집을 지키고 있음에 감사하게 느껴졌다. 여행과 일상은 마음먹기 달렸다. 다녀온 여행은 즐거웠고 돌아온 일상은 너무나 좋았다.

아무런 일정 없이 무심한 하루여도 나는 충분히 가득 찼고 충분히 행복함을 느끼게 됐다.

구독자님들도 일상은 여행처럼 여행은 일상처럼 무심하게 가득 찬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아이가 찍은 사진에 초록이가 있었다. 아이들은 어깨너머 배우는 게 아니라 다이렉트로 배운다는 걸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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