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작업실 Oct 15. 2024

꽃 피는 시간은 짧다.






실내가드닝을 한 지 10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꽃에 눈이 멀어 시작했던 가드닝은 점점 확장돼 내가 좋아하는 꽃에서 '우리 집에 맞는 식물들이기'로 바뀌었다. 처음엔 호기롭게 내 의지로 식물등만 있으면 충분할 거라 여겼지만 화초들은 햇빛의 광량이 약하니 저절로 떠나갔다. 계절에 맞춰 사면 괜찮을 거라며 또 스스로를 설득하고 데리고 왔던 화초들이 연이어 죽어나가자 더 이상 봄이 되지 않는 한 꽃이 피는 건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됐다. 우리 집의 햇빛 환경, 온습도, 병충해의 습격 등등에 의해 일부 식물들이 남겨졌다. 우리 집 화초들은 내가 정한 게 아니라 저절로 살아있는 식물끼리의 조합이 생겼다. 지난 시절에 스쳐간 화초 사진을 보면 정말 너무 아름답다. 지금 봐도 혹할 만큼 너무 아름다워서 함께했던 시간들이나 그 노력과 열정이 아깝거나 시간을 허비했다고는 하지 못한다. 충분히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식물 자체가 아니라 꽃만 보려 했던 나를 볼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1년을 채워가는 초보 식집사는 집에 생물을 들이는 게 아니라 꽃만을 들이고 싶었던 거였다. 그게 허황되거나 나쁜 마음은 아니지만 내 상황에서 고집 있게 밀어붙여서 될 일이 있고 내려놓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식물을 오랫동안 키우려면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집에 맞는 식물을 고르는 것이 서로 상생하는 관계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집엔 대체로 튼튼하기로 유명한 야자 나무류, 여인초나 극락조같은 관엽수, 고무나무류는 아주 무탈하게 잘 크고있다. 광량이 너무 많으면 잎이 탄다는 고사리류는 동향의 우리집엔 너무 잘 맞아 잘 자라고있다. 


사계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식집사의 할 일이었다. 사람도 날씨에 따라 변덕이 있듯이 식물도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식물만큼이나 번식온도가 중요한 병충해는 방심하는 순간 심해져 버려 순식간에 식물을 죽여버린다. 병충해가 있어도 생각보다 영향을 덜 받고 공생하는 식물도 있다. 또 어떤 식물은 갈변된 잎사귀를 따주면 잘 자라는 식물도 있고 잎사귀를 따주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느껴 몸살 하는 식물도 있다. 요즘엔 심지 않은 버섯도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정말 자연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게 있고 보기 싫어도 자꾸만 나타나는 게 있다. 생명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이 이런 과정이 있다.



살면서 나도 모르게 우뚝 서버려 꽃과 같은 시절을 선물 받을 때가 있다. 그때는 마치 내가 세상에 주연이라는 생각에 자신감이 솟아오를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꽤 오랫동안 롱런하는 주연 배우나 가수들의 공통점은 자기 자리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상대배우와 조연, 엑스트라까지 두루 살핀다. 서로 역할 나툼이 다른 것이지 본질은 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주목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만큼 일거수일투족 관찰당하는 삶도 받아들여야 한다. 또 운이 따라주고 따라주지 않음에 따라 그 주목받는 시간은 자신이 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저 최선을 다한다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구나 내 인생에 꽃이 되고 싶은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의 나는 주연이 되는 시간과 조연, 단역 혹은 배경같이 있는 지나가는 사람 1, 2 등등으로 출연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 주목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지나가는 사람이 극을 해치며 주인공이고 싶어한다면 그 극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주연이 아닌 삶을 폄하한다는 것은 또는 주연 아닌 삶을 낙오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정원에서 꽃이 피지 않는 나무는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꽃이 귀할 때도 있지만 꽃이 너무 많이 필 때면 흔해져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고 또 모든 꽃과 잎을 떨어뜨린 계절에는 열매에 시선이 밀려나거나 그저 초록잎 하나 낸 자체가 싱그러워 보일 때가 있다. 내가 그때그때 시절에 맞게 나답게 피워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아름답고 싱그러울 수 있다. 하나의 역할에 매달린것은 종속된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내 정원에서의 꽃을 보는 시기가 그러했듯이 내 삶에서도 꽃이라고 부르고 싶은 시간은 참 짧다.

내 정원에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수많은 초록이를 받아들이듯 내 삶에서도 주목받지 않는 시간들을 잘 보내는 사람이 행복의 질이 높은 주인이 될 것이다.


요즘 너나없이 자신이 주인공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꽃 자리 즉, 주연자리만을 보며 사는 주인공인지 전체를 모두 품으며 사는 주인공인지 돌아봐야 할 때이다. 


이전 24화 때로는 무심한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