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마음이 계속 올라왔다. 아무리 없애보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아이가 내년에 학교에 들어가는 시기라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꼭 아이의 걱정이 아닐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안고 있는 학교 공부에 대한 부담이 피부로 와닿았다. 애초에 경쟁이 익숙한 엄마라면 한쪽 방향으로 쭉 달리는 선택을 하겠지만 나는 좀 결이 좀 달랐다. 아이가 잘했으면 하는 마음은 다 같지만 무한 경쟁시대에 어느 정도를 맞출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예 무던한 엄마인척도 해보고 무관심한 엄마인척 방임도 해보고 여러모로 차선을 선택하며 피해 다녔다. 그래도 내가 뛰어봐야 결국 나고 자란 이곳에서 뛰어가는 것이고 내 아이의 경쟁을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경쟁 속에 있게 된다.
무한 경쟁 속에 뛰어든 아이를 둔 엄마의 마음은 비슷할 거라 본다. 그것도 첫 아이라면 더더욱 그 부담이 배가된다. 이런 내가 더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사실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고등학생들의 입시수업을 했었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필드에서 뛰어야 하고 준비한 아이와 준비하지 못한 아이, 사춘기를 극복하는 아이, 사춘기로 실패하는 아이들을 그 길목에서 한참을 봤기 때문이다. 입시시장에 있는 선생님과 아이들, 부모님들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마음일 거라 예상한다. 그 정도의 비장함이 없다면 우리나라의 입시 시장이 그렇게 크고 탄탄할 수 없는 것이다. 입시전쟁의 성패에 따라 마음속에 훈장을 달며 살 수 있게 되고 또 반대로 상흔을 간직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 성패는 가시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영향을 받는다. 성실하게 집중하고 준비해 온 결과는 오로지 자기 몫이 되고 결국 그 아이를 포함한 그 집안의 체면이 된다. 체면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그 가정의 기쁨의 한 부분이 없어진 것일 뿐이지만 아이는 대체로 자존감이 낮기에 자기 탓을 하거나 다 남 탓을 할 수도 있다. 부모들도 성숙함에 따라 아이의 성공을 그저 기뻐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이 아이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에 반대로 실패를 했더라도 잘 안아주는 부모라면 상관없겠지만 그 상처를 자신의 얼굴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아이에게 더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아이를 많이 낳을 때는 그 책임이 다양하기라도 했지만 이젠 한 두 명이라 이 아이들이 짊어질 무게를 짐작하기 어렵다. 아이도 결국 어른이 될 것이고 어른도 결국 노인이 될 것이다. 내 삶을 책임진다는 것도 어렵지만 가정을 책임진다는 것도 다른 차원으로 어렵다.
결국 아이가 나보다 큰 그릇이라면 아이의 인생에 좋은 조각이 되길 바랄 것이고 내가 아이를 품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아이가 뛰어가는 곳마다 지름을 넓혀 줘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내 안에 불안함은 더 이상 안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현실에 있는 내 고민, 내 아이를 보는 것이다.
매 순간 눈을 뜨고 관찰하는 것이다. 지레 겁먹지 말고 벌써부터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 만이 불안함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