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단발에서 장발로 넘어갈 때 앞머리며 옆머리 길이가 애매해서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더 안 예뻐 보이는 상태가 있다. 그때는 단발로 확 잘라버리면 오히려 더 빨리 괜찮아 보일 수는 있지만 장발로는 더 멀어진다. 그래서 그 애매한 시간을 거지존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괴감을 승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일상을 살면서도 또 인생의 한 부분이 거지존일 때가 있다. 특히 뭔가를 배울 때 거지존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아이도 어른도 매 순간 거지존을 만날 때가 있다.
아이들도 아예 아장아장 걸을 때는 너무 귀엽고 오히려 그 서툼이 사랑받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애매하게 장난기가 발동해서 동물을 따라 하며 이상하게 걷는 시기, 걸을 수 있어도 안 걷는 시기, 걷다가 갑자기 와다다 뛰어가는 속도가 일정치 않은 시기가 되면 그 애매한 사각지대를 만난다. 걸음뿐 아니다. 그저 아장아장 걸어서 나뭇잎 주워보는 정도면 충분히 미소 짓지만 그 뒤의 시간들은 아이가 커가면서 상태에 따라 엄마의 머쓱함과 열받음 그 사이를 견디면서 다음 훈육과 양육을 위한 인내심을 기르는 시간으로 가지게 된다.
어른이 되면서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머쓱하지만 뭔가를 계속 시도는 하고 있다.
뭔가를 시도할 때는 그것만으로도 이해해 주는 범위도 넓고 나 스스로도 나에게 관대해진다. 시작할 때의 부푼 마음은 열정으로 바뀌어서 내가 초보라는 안전지대에서 마음껏 시도를 해본다. 그런데 문제는 애매하게 열심히 했을 때의 문제다. 제임스 클리어가 쓴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처럼 작은 영역부터 시작하기는 했지만 취미에서 특기가 되고 재능의 영역까지 가려면 참 많은 거지존을 만나야 한다.
수능 등급처럼 중간 지대는 정말 분포가 다양하지만 등급이 높아질수록 아주 미세한 노력의 차이로 차원을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 학원일을 했을 때 들은 원장님들의 얘기에 뼈가 있었다.
지역적으로 매번 학생수나 실력적으로 1등을 하는 학원이 있는데 2등 학원과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생각에는 2등 정도면 엇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압도적 1등을 하는 학원이 많다고 했다. 지금은 예전의 입시 상황과는 많이 달라져 모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그만큼 한 차원을 다르게 만드는 노력과 비상함을 배우고 싶어졌다. 그렇게 개인적인 성장에 적용해 보면 나는 어떤 상태의 마음가짐이나 안목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나는 요즘 내가 하는 삶의 많은 영역에서의 거지존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도 맞고 이 정도로 사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지만 그런 가진 것에 대한 것이 아닌 내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원래 내가 전공한 분야에서도 전공은 했으나 더 나아지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늘 했던 방식이 아닌 다른 결로 연습해야 한다는 자각도 일었다. 취미로 하는 가드닝도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배워야 할 부분도 있지만 내가 좀 더 나은 단계로 가려면 또 노력하고 지루한 행동을 해야 함을 알고 있다.
유일하게 운동을 하고 있는 줌바도 '살 빼기 용'으로 따라는 하는데 내 마음의 반영처럼 딱 그 정도로만 세팅돼 그 이상 따라 하지 않으려는 나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조금만 어려워도 대충 얼버무려 거지존이 아닌 것처럼 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열심히는 해보고 못하는 것이랑 아예 안 해서 못하는 거랑은 아는 부분이다. 내가 키우는 아이에게도 너무나 쉽게 진심으로 열심히 하길 바라면서 나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관대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인생을 너무 빡빡하게 살 필요는 없지만 성과를 내지는 않아도 보람되게는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지금 내게 온 수많은 거지존이 빨리 지나가 장발이 된 나를 빨리 만나고 싶지만 그게 더디더라도 노력의 결을 다듬는 시간을 꼭 가지자고 생각해 본다. 연말이라 뭔가 했어야 되지 않나? 반성하는 마음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지금의 고민들도 언젠가 임계점이 지나 증발해 버려 가벼워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꽃 피우기 직전, 생각보다 많은 침묵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