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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작업실 Nov 26. 2024

꿈과 현실

"OO엄마는 그래도 좋겠다~! 꿈이 있었잖아~ 나는 꿈이 없는 사람이었어~!"

옆사람도 거들었다.

"맞아. 맞아. 난 평생 꿈이 뭔가를 헤매고 살았는데 아직도 꿈이 뭔지 몰라~!"


최근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꿈이 있었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마침 생각하기 좋은 계절이었다. 따끈한 여러 가지가 떠오르고 때마침 11월의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다.

날도 점점 춥고 몸은 덜 움직이니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나는 자꾸 꼰대력을 높이며 기억을 해본다. 왕년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그때의 기억과 냄새, 맛이 실제로 느낀 듯 생생했다.


꿈에 가장 가까웠던 적은 두 번 있었다. 이게 꿈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왕년에 내가 이만큼 했다고 말하는 결과물도 100점 만점에 1000점 넘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남을 돕는 이타적인 삶도 같이 하는 '꿈 중의 꿈'을 꾸는 사람도 많다. 나는 그거에 비해서는 한 80점 정도 되는 것 같다. 나는 이기심은 아니었지만 자립에 대한 꿈이 매우 컸다. 거창함을 내비치기 이전에 내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1타 강사는 아니었지만 입시강사 중에서 적어도 5타 강사는 되었던 것 같다. 그중에 일부 기간에는 우리 팀(OO대 준비반) 이 큰 성과를 내서 전국 1등으로 연속으로 많이 보낸 경험도 있다. 그런 행운 덕분에 경찰서에서 학원에 조사를 나온 적도 있었고 타 학원에서 스파이 학생을 보내거나 학원 정보를 알아오려고 이미 다니는 학생들에게 문화상품권으로 문제지 한 장 들고 와달라는 제보도 듣게 됐다. 그때 당시의 'OO대 준비반'은 활기차고 재밌었다. 물론 희생해야 할게 많았다. 'OO대 준비반'은 몇몇 가기 어렵고 경쟁력이 높은 반을 묶어서 입시를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준비과정이 지루하고 복잡하다. 아예 가방끈이 긴 선생님들은 낮은 연봉에 그런 처우를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참 많이 일을 같이 했지만 많이 교체됐다. 그에 비해 나는 비교적 낮은 학벌이었기에 묵묵히 불편한 처우를 감내했다. 이럴 때는 드러나지 않음이 옮길 데가 없음이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더니 나의 가치는 올라갔다. 눈치 빠른 학부모님들은 앞에서 학교네임벨류로써 유명한 선생님이 전부가 아니라 뒤에서 아이에게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선생님이 다른 것을 알고 맞게 처우를 잘해주셨다. 일부 어머님 중에서는 드물지만 동창 선배 분을 만나게 되면 서로 반가워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달달한 기억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부모님과 학생들은 거칠었고 어두웠다. 늘 추웠고 밤늦게 퇴근하고 아침 일찍 출근했다. 인근에 편의점 음식은 너무 물려서 지금은 아예 먹지 않는다. 학원 코앞에는 스타벅스가 있었는데 그 커피를 사서 학원을 가는 게 내 일상 중에 가장 느린 시간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그림 그리고 그림 봐주고 시험 시간을 지켜주는 일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꿈은 일상을 갖는 것이었다. 수능은 매해 다가오고 해마다 그 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 학생은 늘 있기 때문에 그곳은 물리적인 힘으로 나를 분리하지 않는 한 계속 한 사이클로 돌아가는 전쟁터였다. 지금은 좀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예전에 분위기가 좋았던 가로수길, 그곳에 학원이 있어 그곳을 다닐 때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반짝였다. 남들이 봤을 때는 아쉬움이 없지 않을 만큼 살고 있었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있었다. 소규모 학원이 입소문으로 몸집이 커질 때면 그 내부로는 다른 의미로 전쟁터다. 돈냄새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강사시간을 보냈다.


두 번째의 꿈은 우연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름 그림을 전공한 사람인데 전시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글쓰기를 배웠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마다 그림책처럼 내 그림을 글에 실어서 전시를 하면 그 책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전시를 하게 되는 이었다. 그래서 작지만 내 생각을 담아 그림을 계속 그렸고 글을 썼다. 마침 코로나 시국이라 너도 나도 글쓰기가 붐이었고 온라인으로 비대면 글쓰기 강좌를 듣게 됐다. 그렇게 첫 책이 만들어질 때쯤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개인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내 인생에 첫 개인전이라 정보도 전무하고 전시도 해본 적 없어서 정보를 모아서 겨우 개인전을 했었다.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런데 그때도 완전한 행복함은 아니었다.

지방에 살아 거리가 멀었고 코로나가 심할 때여서 아이를 부탁하느라 아이도 부모님도 오지 못했다.

꿈에 가까웠고 기분이 좋았지만 그때도 신기루와 같았다. 액자비, 운반비, 호텔 대여비, 교통비 등등 현실에서 만나야 할 수많은 것들을 배우게 했다. 그 경험이 나를 한번 더 도약하게는 했지만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영원히 그것만을 위해서 그 단 맛을 보기 위해 일상을 희생할 수는 없겠다는 자각이었다.

물론 주목받고 모두가 축하해 주는 순간은 달콤하다. 그렇지만 정말 짧았다. 작은 공간에 내 그림이 꽉 차있다는 희열 사이를 뚫고 아이가 보고 싶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꿈이 있는 삶은 어찌 보면 기쁨이고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외길인생은 사실상 긴 여정이 필요하고 그 짧은 단맛을 위한 삶이고 그 단맛이 내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분야라 항상 허덕이는 삶이 되고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삶에 가까운데 반대로 남을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는 분야라 자존감이 낮아진다. 시야가 좁고 하나가 뾰족할수록 어수룩한 면이 너무나 많다. 내 분야의 일은 깊숙이 알아서 훤하지만 사람 살아가는 일에는 어찌나 빈틈이 많은지 일상에서 '기본'이라고 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능함을 참 많이 발견한다.

일상에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꿈이 없지만 일상에서의 삶 자체가 완성도 높은 사람을 충분히 많이 봐왔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삶이 꿈일 뿐이다. 모두의 삶을 들여다보면 각자 자기만의 보물지도를 가지고 살고 있다. 그게 직업적으로 명명돼있지 않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꿈같은 삶이 모든 면이 달지는 않다는 것이다. 잘 나가면 잘 나가는 대로 피곤함과 일상이 없는 삶을 감당해야 하고 빛나면 빛날수록 친구가 줄어드는 것도 함정이다. 돈이 많이 들어오는 시기에는 신기하게 사기꾼도 잘 붙는 시기이다. 지나고 보면 별 일 아닌 일상이 가장 무겁고 가장 값진 보물인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때를 되돌아보는 '지금 같은 평범한 삶'이 그때는 지극히 이룰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꿈이었다.

지금은 그때가 꿈같고 그때의 나는 지금이 꿈같다. 우린 현실과 꿈을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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