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랑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남편은 그 산을 어린 시절에 아버지랑 같이 올랐던 산이라 어렴풋이 만 기억하고 자세히 어떻게 가는지는 몰랐다. 새해 첫 입산이었는데 그 시간은 주위에 길을 물을 사람도 없었다. 우린 이른 시간이라 그런 줄 알고 서둘렀다. 정신없이 오른 산은 너무 가파르고 길이 너무나 험했다. 한참을 올라갔더니 중턱에서 입산 금지 팻말을 보았다. 저쪽으로만 가지 말라는 줄 알고 피해 사잇길로 갔다.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길에도 입산 금지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멘붕이 온 우리는 내려가기도 애매하고 올라가기도 애매한 지점에서 고민을 했다. 그때 누가 봐도 이 길을 잘 아는 것 같은 등산객 한 분이 저 멀리서 보이길래 얼른 말을 붙였다. 정말 드문 한 분이었는데 물어보니 위로 쭉 가면 정상이 나오긴 하는데 이 쪽 길은 험해서 일반 사람들은 잘 안 오고 둘러서 올라간다고 했다. 그런데 우린 내려가기에도 너무 애매한 위치라서 그냥 힘들더라도 강행하기로 했다. 가기만 하면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안심이 생겼다. 너무 힘들었지만 대신 빨리 산을 오를 수 있었고 덕분에 내려올 때는 완만한 능선을 타고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완만한 능선에는 볼거리가 너무 많았고 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만약 시간만 생각하고 빨리 내려가는 길을 다시 택했다면 그 풍경은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영적인 삶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각자의 방식대로 살면서 알아차리고 살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을 배우고 또 사회적인 수많은 약속을 배우면서 에고로서의 삶을 채운다. 그렇게 채우는 과정에서 삶 속에 수많은 허들을 넘기면서 내면을 저절로 살펴보게 되고 사람은 익어간다. 걷고 달리기만을 하다가 어느 순간 막연히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어디를 향해서 이렇게나 정신없이 뛰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영적인 궁금함과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호기심으로 관심이 향하게 되어있다. 영적인 체험이 따로 없다 하더라도 우주를 보고 그 우주의 수많은 별과 행성을 보며 우리의 존재의 미미함을 인지하게 되고 저절로 내가 쥐고 있는 삶의 관념, 집착하는 고민들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루'라는 체험을 수행하고 있다.
일상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마음속의 필터와 영혼의 해석에 따라 만들어진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 급하게 오른 만큼 빨리 도착했고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던 것처럼 영적인 수행도 비슷하다. 수행을 가파른 산처럼 오르려는 수행 방법도 있고 천천히 자기 근기에 따라 일상을 살면서 수행할 수 도 있다. 급하게 마음부터 닦고 삶을 살겠다는 분들은 구도자,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고 일상에서 살림살이를 하면서 하는 사람들을 각자 저마다의 의식적인 수행을 챙긴다. 기도를 꾸준히 한다든지 종교 기관에 꾸준히 다니며 마음을 일깨우는 말씀을 듣는 다든지 하며 저마다의 영적인 성장을 돌본다.
뭐든 자기의 근기를 잘 알고 자기 그릇을 잘 알아야 탈이 없다. 너무 급하고 너무 빠르게 높은 곳으로 가려는 마음은 오히려 바른 법에서 멀어진다. 종교가 없어도 괜찮다. 하루하루 자신과 타인을 잘 돌보며 하루를 무탈하게 사는 것이 영적인 삶 자체이다. 진정한 영적인 삶은 밝고 산뜻하고 가볍다. 무겁고 어렵고 불편하지 않다. 요즘은 서서히 의식이 깨어나는 시기이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밝아진 많은 사람들은 관점이 바뀌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좀 더 또렷하고 그만큼 나 자신이라는 고집도 잘 보이고 내가 느끼는 감정, 감각도 섬세하게 직관적으로 바라봐질 것이다. 갑자기 선명해진 내 행동을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 살다가 갑자기 벗게 되면 삶이 너무 선명해지는 것과 같다. 이런 느낌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뜰 수도 있다. 그런 모든 과정도 편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럴 때마다 집중할 곳은 현재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에서부터이다. 너무 허황된 영적인 꾸밈도 버리고 특히 급하게 어딘가에 닿아야 할 목표가 있는 것이 없다. 인연이 닿아 이 글이 보이고 그저 잘 읽히고 이해가 된다면 지금처럼 자신을 잘 관찰하고 즐겁게 살면 된다. 그것이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거울을 보고 웃어주자. 수행인 줄 모르고 살아온 지난날의 내 애씀에 따뜻하게 미소로 안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