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어느 흐린 날 - 고래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벗어나 제일 먼저 내가 하는 일은 커피를 내리는 일이다. 커피가루를 필터에 담아 머신에 집어넣었다. 다음으로는 수돗물을 “3-4”이라고 적힌 눈금까지 채운다. 그리고 이제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하면 평소 마시는 드립 커피보다 조금 연하게 내려진다. 서울에서는 항상 직접 내려야 했는데, 그라싸Graça에 오고 나서는 간편하게 내릴 수 있어서 좋기는 하다.
“투두둑 투두둑” 하고 커피머신이 내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창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 “끽 끼익” 하고 지르는 외침을 타고 넘자 드디어 유리창 앞에 다가서게 되었다. 이 집의 거실에는 세 개의 창문이 있다. 양쪽 창문은 허리 높이에 걸쳐 있는데, 다행히도 가운데 창문이 바닥부터 길게 나 있다. 내가 커피 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반면, 그녀는 그 길다란 창문을 열고 아주 짧은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바깥을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녀가 하는 것처럼 나도 창문을 열고 상체를 바깥으로 조심스레 내밀어 보았다. 창문 이쪽에 하룻밤동안 머문 공기와는 다른, 어딘가로 흘러가는 공기만이 품을 수 있는 냄새가 숨결을 통해 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만약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였다면 아마 이 냄새에서 많은 것들을 추출해낼 수 있었겠지. 지난 밤 산책하던 개의 오줌 냄새, 새벽부터 빵을 굽는 냄새는 물론이고 먼저 일어나 하루를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체취들, 그들이 마신 다음 두고 간 커피 찌꺼기 냄새, 그리고 누군가가 흘린 눈물에 섞인 소금 냄새 등등.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여기 리스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셈이다. 아니, 언제나 나는 거의 항상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살고 있었다.
하늘이 흐리다. 비가 올 모양이다.
구운 빵 몇 조각과 치즈 약간, 우유를 부어 넣은 시리얼에 함께 곁들인 우리의 늦은 아침 식사다. 어제 포르투에서 아베이루를 거쳐 산타 아폴로니아 역Estação Santa Apolónia에 내린 다음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와 집에 도착했을 때, 정말 나의 머릿속에는 뭐든 먹고 침대에 누울 생각밖에는 나지 않았다. 아이폰이 알려준, 17Km밖에 안 걸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면서 든 생각도 ‘오늘은 얼마나 걸으려나.’인 것을 보면, 아직도 지쳐 있나보다.
“일단 MAAT를 갔다가, 다음으로는 LX 팩토리야. 그리고 장 봐서 집에 돌아오는 거야. 대신 오늘은 많이 걷지 말자. 갈 때 올 때 트램이나 버스 타면 돼.”
그런 나의 표정을 봤기 때문일까? 그녀도 꽤 피곤했나보다. 걷지 말자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아니면 단지 지친 나를 배려한 걸 수도 있다. 어쨌든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2. 내게는 언제나 비 내리는 벨렝Belém - 고래군
리스본의 15번 트램은 현대식 트램이다. 28번이 오랜 세월이 켜켜이 쌓인 낡은 목제 차체(車體)의 덜컹덜컹 흔들림이 매력이라면, 15번의 매력은 단연코 편안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흔들림 없는 매끄러운 승차감은, 앉아있다 보면 졸음이 몰려올 정도로 말이다. 물론 승객으로 붐비지 않을 때 이야기다. 꼬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이나 피게이라 광장Praça Figueira에서 출발하여 벨렝을 다녀오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교통편이기 때문이다. 자칫 단체관광객 두어 팀이 몰리기라도 하면 아주 그냥 …….
그녀와 함께 찾은 MAAT는 Museu Arte Arquitetura Tecnologia의 약자이다. 한국어로는 ‘예술 건축 기술 박물관’ 정도가 되려나? 어쨌든 디자인 하는 그녀를 만나면서 덩달아 나도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게 되었다. 15번 트램을 타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하늘의 잿빛이 짙어지고, 바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MAAT의 신관이었다. 예전에 찾아왔을 때 공사하던 곳이, 이제 와서 보니 근대적 건축물로 바뀌어 있다. 정말 ‘근대적modern’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자연물을 합리적 이성으로 재단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근대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신관이고, 바로 옆에 본관 건물이 있대.”
“저번에 왔을 때 비가 쏟아져서, 비 피한다고 들어갔던 데가 이 근처 아니었어?”
“그랬나? 오빠! 이 책 봐! 세르지… 블록?”
그리고 어떤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집을 들춰보는 그녀 너머 유리창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제발 좀!! 저번에 이 동네 왔을 때도 쏟아 붓더니, 이번에도 비가 오냐…….
세찬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질 뻔 했던 위기도 수차례. 결국 또 퍼붓는 빗줄기 때문에 오늘 나머지 일정은 모두 포기하기로 했다. 아, 그리고 저번에 왔을 때 비를 피했던 그곳이 알고 보니 MAAT 본관이었다.
#3. 이제 뭐 할까? - 미니양
어째서 고래군이 벨렘에만 가면 비가 오는지 알 수가 없다. 저번에 포르투갈에 함께 갔을 때도 벨렘에 갔던 날은 비가 왔다. 한 달을 머무는 동안 2번 벨렘을 갔었는데, 꼭 그 날만은 비가 왔다. 결과적으로 고래군이 벨렘에 가면 비가 올 확률 100%!
곡선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MAAT에 감탄을 하며 둘러보았지만, 정작 전시는 끌리지 않았다. 전시장샵에 들어가 이것 저것 구경하다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인 작가인 serge bloch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살까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다 미리 사면 무거우니까 집에 돌아갈때 사야겠다 마음을 먹고 돌아서서 벨렘으로 향하는 길. 잔뜩 흐리던 하늘은 결국 비를 쏟아냈다. 작은 베이커리에 들어가 카페 한 잔과 달디 단 포르투갈 과자 하나를 해치우며 생각했다. '이제 뭐 할까?'
고래군과 머리를 맞댄 끝에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지금 먹을 식재료 말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갈 것들을 미리 사두기로. 우리는 여행지를 가면 이상하게 다른 기념품보다 그 나라 슈퍼나 시장에서 파는 먹을거리나 생필품을 많이 사가지고 오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옆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주택가가 나오는데, 그 곳에 큰 슈퍼가 있었다. 이케아를 갈 때 지나가는 길이라 큰 어려움 없이 슈퍼에 도착했다. 남은 날이 별로 없으니, 당연히 남은 유로도 많지 않아 돌아가는 날까지 맞춰서 사용하고 있었다. ATM에서 한 번에 200유로 밖에 찾을 수 없는데, 수수료도 만만치 않아서 오늘만큼은 카드를 긁으리라 마음먹고 슈퍼로 들어섰다.
한참을 쇼핑하고 나온 우리의 가방과 두 손에는 한국으로 가져갈 푸짐한 식재료와 생필품, 그리고 만만치 않은 금액의 카드영수증이 들려있었다.
맞다! serge bloch 책 안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