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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Apr 17. 2019

영화 <러브리스>, ‘사랑’의 반대편

소년의 죽음을 외면하는 당신



 러시아의 영화들은 그동안 우리에게 다소 낯설기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 2019년에 들면서 그동안 멀게만 있던 러시아의 작품들이 연이어 선을 보이고 있다. 빅토르 초이와 당대의 러시아 음악가들을 다룬 영화 <레토(Лето, Leto)>(2018)가 올해 초 한국에서 개봉한데 이어, 이번에는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의 영화 <러브리스>(2017)가 2019년 4월 18일 개봉하는 것이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즈뱌긴체프Андре́й Петро́вич Звя́гинцев는 러시아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영화 데뷔작인 <리턴>(2003)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엘레나(Елена/Elena)>(2011)이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출품되어 특별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리바이어던(Левиафан/Leviathan>(2014)이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 영화상 후보로 선정되는 등 일찌감치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그 명성을 이어왔다.


 영화 <러브리스>는 즈뱌긴체프 감독의 최신작으로, 2017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Jury Prize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영화제인 제43회 세자르 상César Award에서는 외국영화상Best Foreign Film을 수상했고, 제30회 유럽 영화상European Film Awards에서는 촬영감독인 미하일 크리치만Михаил Кричман/Mikhail Krichman이 촬영상을 수상했고, 즈뱌긴체프 감독의 영화 시나리오를 함께 작업하는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 올렉 네긴Oleg Negin도 즈뱌긴체프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그밖에도 제90회 아카데미상 최고외국어상 후보작으로 선정되는 등 전 세계에서 다방면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사랑의 반대편



 일단 한국의 독자 또는 관객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영화의 원제인 ‘Нелюбовь/Nelyubov’가, 영어로 번역된 제목인 ‘Loveless’와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목으로 번역된 영어 단어 ‘Loveless’는 사랑의 부재 혹은 결핍을 의미하지만, 러시아 단어 ‘Нелюбовь’는 ‘anti-love’ 즉 증오나 미움 등의 의미에 더 가까운 단어이다. 좀 더 엄밀하게는 신학적 혹은 관념적 측면에서의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대척점에 위치하는 개념인데, 때문에 즈뱌긴체프 감독 역시 영화의 제목을 ‘Loveless’나 ‘Lovelessness’로 번역되는 것에 대해, ‘번역 불가능성’을 언급하면서까지 아쉬움을 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외래어표기법에 의하면, ‘러브리스’가 아니라 ‘러블리스’라고 해야 한다.)


 이 점을 기억하고 나면, 영화 <러브리스>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영화가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하나가 있다. 두 명의 주인공 ‘보리스Boris’(알렉세이 로진Aleksey Rozin 분)와 ‘제냐Zhenya’(마랴나 스피박Maryana Spivak 분)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는 상대에게 ‘자신을 향한 사랑이 없는 상태’라고 주장하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이는 두 인물이 남성/여성, 아버지/어머니 등의 이항대립성을 통해 서로에 관해 배타적 관계에 있는 동시에, 그들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동일한 발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너’라는 발화요소, 즉 상대방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이들은 ‘아버지/어머니’이며 ‘남성/여성’ 등의 대립쌍인 동시에, (서로에 대한) 주체와 타자 나아가 당대 러시아 사회의 ‘보편적 주체 혹은 타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표면적으로는 상대를 향해 투사되는 것처럼 보이는 ‘너에게는 나를 향한 사랑이 없다’는 영화의 메시지와 이미지는, 실질적으로는 ‘내 안에 사랑이 없다’ 혹은 ‘내 안에는 넬류보프(anti-love)가 있다’는 현상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향해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 교회, 회사, 가정, 그리고 이데올로기



 영화의 문법은 서사성보다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영화 <러브리스>는 이러한 ‘영화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영화의 메시지가 서사보다는 이미지에 좀 더 집중할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각자 불륜을 저지르는 부부 사이에서 절망한 아들이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는 영화의 ‘사건의 흐름’은 이 영화의 핵심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미지’는 시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청각을 포함하는 다양한 감각 이미지, 그리고 구체적인 ‘의미’가 생성되기 직전 단계의 심상으로서의 ‘이미지’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진 개념을 가진 단어이다.


 영화 <러브리스>의 의미심장한 첫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러시아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국가의 깃발이 매달린 곳은 네모반듯한 직선으로 구성된 회색 건물이다. 국기가 달린 회색 건물은 학교 건물이다. 국가의 상징인 깃발이 달린 학교는 국가의 법과 훈육을 결합시킨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건물은 수직과 수평이 직각으로 만나는 형태이다. 따라서 독자 또는 관객들은 의식적으로 읽어냈든 무의식적으로 기입되든 간에, 국가의 법과 아버지의 질서가 아이들에게 덧씌워지는 장소-기구로서의 ‘학교’의 이미지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퀀스는 황량하고 적막하기만 한 학교 건물로부터 수많은 아이들이 ‘탈출하듯’ 빠져나오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아이들 사이에는 제냐와 보리스의 아들인 열두 살 소년 ‘알로샤Alyosha’(마트베이 노비코프 Matvey Novikov 분)도 있다.


 집으로 돌아간 알로샤가 가정에서 만나는 것은, 이혼을 앞두고 서로에게 소리 지르며 싸우는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전통적인 관념에서 말하는 이른바 ‘모성애’ 같은 것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가정에는,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자면, 남성인 ‘아버지의 목소리’만 존재한다. 소년에게 있어 집이란, 물건을 던지고 윽박지르며 훈육하는 ‘아버지’의 공간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훈육 방식을 간혹 ‘체벌’이라는 명칭으로도 부른다.


 제냐의 남편이자 알로샤의 아버지인 ‘보리스 슬렙초프Sleptsov’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젊은 애인 ‘마샤Masha’(마리나 바실리에바Marina Vasilyeva 분)를 사랑한다. 그리고 보리스는 회사에서 IT계열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일하는 회사는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소유한 회사로, 보리스의 사장은 이혼 등의 종교적 교리 내지는 율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직원은 해고한다. 보리스의 회사는 업무 능력이나 실적보다는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를 중시하기 때문에, 율법이 직접 지배하는 기구이다. 근대 이후의 ‘교회’보다도 더욱 종교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리얼리즘 스타일의 카메라 기법과 결합하면서, 영화의 디제시스 공간이기도 한 ‘러시아의 현실’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 또는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개념 내지는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인식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이미지와 관념 등이 재현되는 체계라고 설명하면서, 가정이나 교회, 학교 등이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라고 지적했다. 알튀세르의 설명대로라면 영화 <러브리스>는 러시아의 ‘지금-여기’를, ‘학교’와 ‘아버지의 가정’, 그리고 ‘교회 같은 직장’이라는 사회적 기구들을 통해 국가와 아버지의 통치 아래 얼어붙은 공간의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여기’로 지시되는 러시아의 대척점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포르투갈이라는 점이다. 제냐의 연인 ‘안톤Anton’(안드리스 케이슈Andris Keišs 분)은 포르투갈에 체류하는 딸과 영상통화를 하며 딸에게 러시아로 돌아올 생각이 없냐고 묻는다. 그러자 안톤의 딸은 아버지에게 왜 돌아가야 하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영상통화 속에 나타나는 안톤의 딸이 짓는 표정과 상황은 안톤과 연인 관계에 있는 제냐의 표정 및 상황과 묘하게 대비된다. 영상 속 지금-여기가 아닌 ‘포르투갈’에서는 행복하게 웃는 표정으로 ‘오브리가두’라고 인사하지만, 러시아에 있는 제냐는 무표정하게 ‘스빠시바’라고 인사하기 때문이다. ‘Obrigado’와 ‘Спасибо’는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는 의미의 단어들이다. (물론 여성은 ‘Obrigada’라고 하지만, 발화 주체가 외국 사람인 상황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리고 직접 들어보면 포르투갈 사람들도 ‘-가두’와 ‘-가다’를 분명하게 구분되도록 발음하지도 않는다.)


 한편 영화 <러브리스>는 자극적인 이미지를 통해 독자 또는 관객들의 정동을 직접 움직인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독자 또는 관객들은 갑작스럽게 제시되는 정사 장면이나 인물들의 나체를 담은 장면, 그리고 알로냐의 참혹한 시체를 정면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 장면들은 비록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반쯤 가려져 있는 듯하지만, 피사체의 이미지와 행위들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노출된다. 영화의 이와 같은 이미지 활용은 영화가 형성하는 그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 또는 관객들의 감정을 불규칙하지만 큰 폭으로 진동시키는 효과로 나타난다. 즈뱌긴체프 감독은 이를 통해 영화 <러브리스>의 플롯 구성에 따라 독자 또는 관객들이 가지기를 원했던 긴장감을 성공적으로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소년의 죽음을 외면한 것은 바로 당신, 그리고 우리



 실종된 알로샤를 찾는 과정은 일상의 공간에서 도시 외곽의 숲, 그리고 도시 전체로 점차 확장되어간다. 이러한 구조에서 ‘개인적인 일상’과 ‘사회 전체’ 사이에 ‘숲’이 위치하게 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즈뱌긴체프 감독이 개인과 전체 사이의 경계, 혹은 (개인의) 의식과 (집단 전체의) 무의식 사이의 경계로서 설정한 것이 ‘숲’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영화 <러브리스>의 첫 번째 학교 시퀀스는, 알로샤가 집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학교에서 탈출한 알로샤는 홀로 발걸음을 옮겨, 도시 외곽지역의 ‘숲’으로 접어든다. 알로샤는 집으로 돌아가는 경로로서 ‘숲’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시퀀스는 알로샤는 알록달록한 비닐테이프 끈을 연못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 가지에 던져 걸쳐놓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알로샤는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그 ‘숲’이 ‘학교’라는 집단의 장소와 ‘집’이라는 사적(私的)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공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 숲은 아주 오래된 나무와 연못이 있다는 점에서 태초부터 존재하는 숲이며, 폐허가 된 건물이 위치했다는 점에서 소비에트 연방 시절이라는 과거의 기억과 역사가 남아있는 숲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하면 그 숲은, 기억과 무의식과 비非 도시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이 함께 공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 ‘알로샤’의 죽음 이후-시체를 목격하고 난 이후가 되어야, 독자 또는 관객들은 소년이 막대기를 달아서 던져 걸어놓은 그 알록달록한 끈이 어쩌면 구조를 외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곳은 독자 또는 관객들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로샤가 살려달라고 외쳤던 (즈뱌긴체프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요한 침묵silent cry’을 줄곧 외면해왔던 것은 다름아닌 독자 또는 관객들이 된다. 분명 영화의 도입부에서 알로샤가 구조를 호소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은 오직 극장에 앉아 그것을 보고 있던 독자 또는 관객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알로샤의 죽음 이후 보리스와 제냐 모두 각각 새로운 가정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영화 <러브리스>는 소년의 죽음을 포함하는 이들의 일상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제냐가 안톤과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제냐는 알로샤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지 못했던 그 순간과 마찬가지로 다시 스마트폰에 코를 처박고 SNS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다음 장면에서 제냐는 발코니로 나간다. 그런데 ‘RUSSIA’라는 글자가 가슴에 커다랗게 그려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제냐가 하는 행위는 다름아닌 ‘트레드밀’을 달리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장면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제자리 뛰기, 영원한 반복이다.



다시, 사랑의 반대편



 영화를 좀 더 유심히 보거나 읽은 독자 또는 관객들이라면 영화 <러브리스>에 나타나는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들을 기억할 것이다. 자동차에서 들리는 라디오와 집에 틀어놓은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들은, ‘영화 속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미지 속의 이미지’에 해당한다. 이는 극중극 혹은 영화 속 영화의 측면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데, 허구의 허구는 곧 진실이라는 메타드라마의 속성을 떠올려본다면 영화 <러브리스>에 나타나는 대중 매체의 메시지들은 실제 사건들에 대한 선명한 진실이라는 속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라디오의 메시지는 ‘러시아의 부패한 정권과 사회상’을 말하고, 텔레비전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영화는 제목 그대로 ‘Nelyubov’, 사랑의 반대편을 이야기하고 있다.


 @ ‘보리스’와 ‘제냐’, 그리고 ‘알로샤’는 그 역할을 연기하기가 꽤나 어려웠을 캐릭터들이다. 다양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태를 표현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보리스’를 연기한 알렉세이 아나톨리에비치 로진Алексей Анатольевич Розин/Aleksey Anatolievich Rozin은 모스크바 아트씨어터 스쿨 출신의 영화/연극 배우로, 즈뱌긴체프 감독의 전작인 <엘레나>와 <리바이어던>에도 출연했다.


 ‘제냐’를 연기한 마랴나 티모페브나 스피박Марьяна Тимофеевна Спивак/Maryana Timofeevna Spivak도 모스크바 아트씨어터 스쿨 출신의 배우로, 영화와 병행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주로 텔레비전 시리즈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이번 영화 <러브리스>를 통해 2017년 러시아 영화평론가 협회의 ‘최고 여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로샤’를 연기한 마트베이 노비코프Mатвей Hовиков/Matvey Novikov는 250명의 어린 배우들이 지원한 여섯 차례의 오디션을 거쳐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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