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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May 21. 2019

영화<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영원한 돈키호테들을 위해

수많은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The Man Who Killed Don Quixote>는 기발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스타일로 유명한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 감독의 2018년 작품이다. 작년 칸영화제 폐막작으로 공식 상영되면서 처음 공개되었고, 이후 프랑스를 시작으로 세계 각지에서 상영되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서야 드디어 한국에서도 2019년 5월 23일부터 독자 또는 관객들 앞에 선을 보일 예정이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영국의 시나리오작가 토니 그리소니Tony Grisoni와 테리 길리엄이 함께 시나리오를 작업했고, 테리 길리엄이 직접 감독을 맡아 제작한 영화이다. 그리소니와 길리엄은 이미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1998), <타이들랜드Tideland>(2005) 등에서도 함께 시나리오를 작업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한국에서는 ‘돈 키호테Don Quixote’를 ‘돈키호테’로 잘못 표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스페인어 Don/Dona는 이름 앞에 붙이는 존칭으로, 귀족이나 명사名士, 사제 또는 유력가 등에게 사용했지만 현재는 일상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일단은 이 글에서도 이 표기법을 따르기로 한다.


 테리 길리엄 감독은 한국에서는 <12몽키즈12Monkeys>(1995)나 <그림 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The Brothers Grimm>(2005), 그리고 배우 히스 레저Heath Ledger의 유작이기도 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2009) 등을 통해 알려진 감독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 앞서 언급한 이 작품들보다는 영국의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언이자, 그들과 함께 만든 작품인 <몬티 파이썬Monty Python> 시리즈의 감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이 시리즈의 개그 코드는 7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코미디 장르 전반에 걸쳐 지금까지도 강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17년에 걸친 완성,
장 로슈포르와 존 허트를 기리며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테리 길리엄이 1989년 처음 기획한 것이다. 1998년이 되어서야 사전제작에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고 비로소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프랑스의 영화배우 장 로슈포르Jean Rochefort가 돈 키호테 역할을, 그리고 조니 뎁Johnny Depp이 토비 그리소니 역할을 맡았다. 장 로슈포르는 이를 위해 7개월 동안 영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2000년, 드디어 스페인 북부 나바레Navarre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홍수로 인한 세트와 장비 파손, 로슈포르의 질병 등의 문제로 제작 일정이 초과되었고, 여기에 예산까지 초과해버리면서 제작이 엎어지게 되었다. 이 눈물겨운 과정은 다큐멘터리 <Lost in La Mancha>(2002)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후 테리 길리엄은 2016년이 될 때까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제작을 다시 준비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산이 발목을 붙잡았다. 거기에 조니 뎁의 바쁜 일정, 그리고 돈키호테 역할로 캐스팅된 영국의 배우 존 허트John Hurt의 투병에 이은 죽음 등의 이유로 다시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토비 그리소니 역할을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에게, 그리고 키호테 역할을 조나단 프라이스Jonathan Pryce에게 맡기면서 촬영에 들어갔고, 처음 제작을 시작한 2000년에서 17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촬영을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엔딩 크레딧 마지막 부분에서 세상을 떠난 장 로슈포르와 존 허트에게 바치는 헌사를 바친다. 처음 기획을 시작한지 30년, 그리고 제작을 시작한 시점에서부터만 보아도 17년에 걸쳐 완성한 영화에는, 이제는 볼 수 없는 두 배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소설과 영화의 사라진 경계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주제의식은, 원작 소설에 대한 그리소니와 길리엄의 해석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은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낳은 속물적 물신주의에 의해 소외되는 순수한 ‘인간성’, 혹은 인간적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영화감독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토비 그리소니Toby Grisoni’(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 분)이다. 시나리오를 함께 작업한 토니 그리소니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주인공은 능력을 인정받는 유망한 광고 제작 프로듀서이다. 그는 과거 순수한 예술영화를 지향하던 젊은 영화감독이었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제한 없는 소비를 미화한다. 이 작업을 가장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바로 ‘광고advertisement’이다. 광고는 흔히 ‘상품 예술’ 내지는 ‘상업 예술’이라고 지칭하는 분야의 정점에 위치하는 것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들을 자기 발 아래로 모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예술성, 혹은 예술적(상업적) 가치를 증명한다. 이렇게 동원되는 가치들 중에는, 심지어 자본주의를 반대하던 ‘사회주의 혁명’까지도 포함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토비는 광고 촬영을 위해 ‘돈키호테의 이미지’를 디제시스Diegesis에 출현시킨다. 그리고 원하는 이미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와중에, 10년 전 자신이 학생 시절 만들었던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만나게 된다.


 독자 또는 관객들은 이 순간 토비의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와 토비의 광고 ‘돈키호테’라는 두 개의 기표를 만나게 된다. 순수한 열망을 지향하는 영화와 순수한 물신을 지향하는 광고는 서로 대립하지만, 이 둘은 모두 ‘토비 그리소니’라는 주체를 형성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 구조는, 독자 또는 관객들이 보고 있는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와 소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독자 또는 관객들은 각각 소설 <돈키호테>를 읽었거나 혹은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제부터는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봤으며 알고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독자 또는 관객들의 주체성 내부에는 소설과 영화가 서로 대립하는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영화 속에서 ‘영화와 광고’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극장이라는 현실 세계에서 소설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까지도 함께 모호해지게 된 것이다.



환상과 현실의 자리 바꾸기


 영화 속에서 토비가 학생 시절 만들었던 영화가 등장하는 순간, 흔히 ‘액자 구조’라고도 부르는 ‘메타드라마metadrama’ 형식이 나타나게 된다. 좀 더 자세히는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와 영화 속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라는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외부영화(이후 ‘외화’)의 기표와 내부영화(이후 ‘내화’)의 기표가 동일한 문제가 개입한다. 이 문제는 ‘그리소니’라는 동일성과 결부되면서 영화의 단일성에 균열을 낸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독자 또는 관객들이 외화와 내화 사이의 ‘차이’에 집중하면, 이 둘을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화에서 ‘돈키호테’를 연기했던 구두장이 ‘하비에르Javier’(조나단 프라이스Jonathan Pryce 분)가, 외화로 뛰쳐나와 ‘돈키호테’가 된다. 디제시스 내부에 존재하는 허구적 영화에 존재하는 ‘돈키호테’라는 환상이, 영화 속 현실에 ‘돈키호테’라는 실존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돈키호테가 내화 속에서 외화로 뛰쳐나오는 순간, 이제 영화 속에서 환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가 사라져버린다. 내화와 외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내화를 만든 토비의 주체는, 이제 외화에서 돈키호테의 종자 산초 판사Sancho Panza와 광고제작자 토비 사이에서 흔들리게 되고, 나중에는 앙헬리카Angelica(호안나 리베이로Joana Ribeiro 분)를 사랑하는 젊은 시절 영화감독 토비의 정체성까지 이 경쟁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이 목격하는 것은, 토비라는 주체가 환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양쪽을 수없이 횡단하는 과정과 그 결과인 것이다. 토비는 결국 하비에르의 죽음 이후, ‘돈키호테’라는 새로운 주체로 스스로를 명명하게 된다. 이 장면은 환상이 현실과 그 위치를 맞바꾸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디제시스 공간에서 스스로의 삶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행위로 실천하는 주체는 오직 ‘돈키호테’ 한 명뿐이라는 점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스크린의 저쪽과 이쪽


 소설이나 연극, 영화 등의 허구fiction 안에 삽입된 장치로서의 허구는, ‘거짓 속의 거짓’이나 ‘환상 속의 환상’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진실을 지향하게 된다. 따라서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있어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 삽입된 여러 허구 장치들―토비의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와 소설 ‘돈키호테’―을 인식하는 것은, 일상 세계에서는 항상 은폐되어있는 진실이 드리운 그림자를 일순간 인지하고 경험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부서사는 토비 ‘그리소니’가 만들었고, 외부서사는 토니 ‘그리소니’가 만들었다. 이 ‘그리소니’라는 동일성 역시 중요한 영화 장치이다. 내화와 외화 사이의 관계를 외화의 외부와 내부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장시키는 동시에, 이 연쇄에 무한한 반복성도 함께 부여하기 때문이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라는 환상 내부에서, 환상과 현실 사이를 가르는 깊은 강물은 결국 말라버린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만나 몸을 뒤섞어버린다. 토비 그리소니는 자신의 환상을 만나 ‘돈키호테’라는 새로운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독자 또는 관객들은 그들과 같은 현실 세상에 존재하는 토니 그리소니라는 ‘돈키호테’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이제 스크린의 저쪽과 이쪽 사이를 구분하는 것도 조금씩 불가능해지기 시작한다. 앙헬리카가 사랑과 꿈을 위해 산초 판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처럼, 독자 또는 관객들 중 누군가도 자본주의 질서가 안내하는 길에서 벗어나 황야로 겁도 없이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또한 이렇게 외칠 지도 모른다.


I am Don Quixote de La Mancha.

And I will live forever.

나는 라 만차의 돈키호테.

그리고 나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中.


@ 나중에 포르투갈에 또 가면 토마르Tomar에 들러서, 영화에서 성castela/castillo/castle으로 나온 그리스도 수도원Convento de Cristo에 한 번 가봐야겠다.


@ 로케 바뇨스Roque Baños의 멋진 음악이 영화의 초현실적 성격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초현실적’은 현실을 초월한 어딘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quixotemovie.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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