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소리를 들려줘
2024년 7월 27일 김희수아트센터에서 작곡가이자 연주자, 음악학자인 ‘조훈’의 공연 《Acculturation, 求音》이 열렸다. 수림문화재단의 넛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된 무대이다. 조훈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임정민의 대금, 황혜영의 거문고, 박세찬의 전자음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1.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두 단어를 나열하고 있는 공연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각각의 단어들로 인해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생각이 두 갈래 방향으로 뻗어갔기 때문이다.
“Acculturation”은 이민이나 유학, 여행 등 어떤 주체가 다른 문화권에 진입했을 때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말하는 용어로, 나아가 이제는 각자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개별 주체들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까지도 의미한다. 화행 모델의 변화와 맞물린 이러한 용례 변화는 최근에는 수행성의 문제와도 종종 결부되기도 하며, 보통 한국에서는 ‘문화접변’이나 ‘문화변용’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사실 ‘문화’부터가 워낙 그 범주가 방대하면서도 의미경계가 모호한 용어라서, “Acculturation”도 다소 복잡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주체(a)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비투스와 전혀 다른 문화권(B)에 진입했을 때 그 주체에게 나타나는 체험의 양상, 가치관이나 관점의 변화 등을 지시하고자 할 때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해당 주체(a)가 진입하는 문화집단에 속하는 주체(b)에게도 해당 주체(a)와 그의 문화(A)는 일종의 문화충격을 유발하는 강도(intensity)로 작용한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명이 좀 복잡한가? 쉽게 말해서 “Acculturation”이라는 용어를 표제에 넣음으로써, 이번 공연이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접촉이 모두에게 어떻게든 차이를 발생시키는 사건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미리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해보자. 더 쉽게 말하자면 그냥 ‘누군가를 처음 만나고 서로 알아가는 것은, 나와 그 사람 모두가 조금씩 변화할 가능성(잠재성)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고 보니 공연의 제목은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뒤에 “求音”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이었다. 처음엔 이게 이를테면 ‘정음(正音)을 구하는 행위’를 뜻하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여기서 ‘정음’은 가장 완벽한 소리, 삼라만상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소리,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을 관통하는 소리 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래서 ‘정음을 구(求)하다’라는 의미소를 통해, 이번 공연이 아마도 소리(음악)의 영역에서 행하는 일종의 구도(求道) 행위와도 같은 형식을 가지게 될 것인가 하고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음악을 듣는 동안 두 번째 짐작은 완전히 오해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무대 위에서 연주되는 소리를 통해 각각의 악기들이 타자들에 대해서 ‘당신의 소리(音)를 들려주세요(Ask, 求).’라고 요청하고 있음을 금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이번 공연은 나에게는 차례대로, ①어떤 주체가 낯선 곳에 도달하여 타자들을 만나고, ②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각자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하게 되며, ③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두 자신이 본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가 기존의 일상성(Normality)에 재차 매몰되는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로 여겨졌다. 그리고 성장서사(Bildungsroman)가 그렇듯 처음 시작할 때의 각자가 마지막에 도달한 시점에는 처음과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어떤 차이를 가지게 된 것처럼도 느껴졌다. 그래, 바로 그거다. 마치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 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세 사람은 각각 피아노, 대금, 거문고이다. 이 세 가지 악기들은 무대 위에서 한국 전통음악 체계 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복합박자를 개별적으로 사용하거나, 각각의 파트가 서로 다른 박자 체계를 가지게 되거나,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를 횡단하게 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개별성을 드러냈다.
물론 무대 위에는 ‘피아노’와 ‘대금’과 ‘거문고’와 ‘(미리 준비된) 전자음’이라는 네 개 파트가 있었다. 하지만 세 개의 주체가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 이유는, 전자음의 경우 나머지 세 악기들이 각자에 대하여 상호보완적이거나 때로는 배타적인 관계를 맺는 과정에 대하여 일종의 맥락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음은 무대 위에서 나머지 다른 악기들(피아노, 대금, 거문고)과 변별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개별자들에게 제공되는 동일한 기표(전자음)가 각자의 맥락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현상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전자음은 나머지 세 악기들과 대조되는 요소로써 무대 위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전자음은 비교적 최근 탄생했으며 실재하지 않는 기호(데이터)를 소리로 전환한다. 하지만 나머지는 비교적 과거부터 존재해왔고 직접 연주를 통해 소리를 생성한다. 따라서 후자의 세 악기가 세계라는 무대에 던져진 각각의 존재자를 상징하고 있었다면, 전자음은 동시대의 세계가 구축되고 존재하는 형식을 무대 위에 상징적으로 재현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이후 출현한 ‘현대음악(Contemporary Music)’은 기존의 조성 체계나 음계 구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우연성(잠재성)을 끌어들여 연주되는 순간 비로소 음악의 구조와 형태가 확정(생성)되게끔 함으로써 독자적인 문법을 제시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훈의 음악도 이런 맥락에서 듣고 또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번 공연은 피아노와 거문고와 대금 사이에서 각각 자기가 가진 차이(이는 변별력이자 동시에 존재성)를 드러냄으로써 자기만의 고유한 음색과 문법을 가지고 있음을 상호 간에 확인하게 만드는 과정에 대한 사유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추가로 각자의 악기들이 상대방으로부터 도출되는 차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어떻게 앙상블을 형성할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 과정, 그리고 ‘(미리 준비된) 전자음’ 속에서 갈등이 출현하고 재차 다름이 두드러지는 현상까지도 무대화했다. 그렇게 본다면 이번 공연의 첫 번째 곡의 제목이 <Heteroglossia>, 즉 ‘이종(異種) 언어성’이라는 점은 제법 의미심장한 명명(命名)이기도 하다.
3.
이제 공연의 제목이 왜 “Acculturation”과 “求音”의 결합인가에 대해서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기원과 문화와 언어가 서로 다른 개별자(악기)들이, 동일한 공간에 모여 발화하고 또 그 담론을 수용하는 현상을 청각화한 것이 이번 공연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각자가 다른 곳에서 왔고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한다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이번 공연을 보면서 새삼스럽지만 다시금 깨닫게 된 것 같았다.
공연을 보는 내내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모처럼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공연을 보게 되어서 정말이지 즐겁고도 기뻤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만나고 싶은 무대였다.
※ 이 글은 수림문화재단 수림아트에디터 [숲-er]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