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낯에 침 뿌리기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하고 얼마 후, 나는 내 요청에 따라 아예 소속 본부를 옮겼다.
얽혀있는 자들과 안 마주칠 수 있도록 타 계열사로의 전배를 요청했지만 회사는
1)인사시기가 아니라 지금 계열사 전배를 가게 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며,
2) 아직 근무한지 1년도 채 안된 신입을 계열사 전배 보내는 건 일전에도 없었던 일이라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그러고는 단 한가지 옵션만을 내게 들이밀며, 회사가 성심성의껏 고민한 요청에 수락하라는 식으로
강요를 했다.
내가 전배를 간 그 부서는 주력 업무가 없어 추후에 내게 계약직 서무 업무를 (내 브런치 첫번째 글 참조)
본업으로 떠맡길 만큼 무능한 부서였다.
가해자는 징계로 좌천을 명 받았는데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성과가 좋아 옮기는 것 처럼
꽤 괜찮은 귀양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심지어 좌천을 간 본부에서는 때에 맞춰 인사개편이 되었고, 그 상사가 좌천되어 거기로 옮기는 건 묻혔다.)
독사같던 그 팀장은 경고만 받고, 그 해 말 인사개편에 승진까지 하게 된다.
팀을 옮기고 첫 한 달 간은 그 팀도 조직의 성격이 변화되어 분주했고, 할 일도 많아 보였다.
새로운 팀장은 막 작년 말에 이직하여, 이번에 처음으로 팀장 직급을 달아 열성있어 보이기도 했다.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회식 빼곤 해보지도 않은 야근이란 걸 처음으로 몇 번 해보기도 했고,
일 시작한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막내가 제안서 작업도 척척하고 보고서도 제출하다보니 이전 부서에서
팀장이 지칭하던, '월급값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입이 한 달 새에 'super rookie'가 되어 있었다.
(독사같던 그 팀장은 항상 신입더러 '회사에서 그 연봉을 주는 게 손해인 인력'이라 지칭했고,
그래서 특히나 월급값을 하기 위해서는 회식이라도 잘 나와서 상사 기분을 맞춰야 한다고 습관처럼 말했다.)
그 때는 인정 받는게 좋아 열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지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부서에서 처리해내는 업무가 신입이 무리없이 처리할만큼 기초적이라는 것의 방증이기도 했다.
조직은 당연히 노는 부서가 있기를 원치 않았고, 명망있는 기업에서 대단한 레퍼런스를 쌓아온 사람을
실장으로 영입했다. 내가 부서에 배치되고 한 달 반 만의 일이었다.
업계 최고라는 기업에서 다양한 업적을 달성한 새 실장은 단번에 내가 속한 부서가 명확치 않은 R&R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지 파악이 안 되었었나 보다.
입사 후 얼마 안 가 팀장을 불러다가 팀이 하고 있는 일과, (본인이 필요할 때 참고하여 팀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팀원들의 업무 특성과 장/단점을 기술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팀장은 새로 온 실장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는지,
쓸 데 없이 디테일한 부분까지 살려서 팀원들의 특성과 장/단점을 기술해서 메일로 제출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ㅎㅎ
처음으로 팀장을 달고 나서도 제대로 된 업무가 없었던 팀이 속상했던 팀장은 그 메일을 보낸 날 저녁에
지인들과 진탕 술을 먹었고, 다음 날 술이 덜 깬 채로 평소 출근시간보다 늦게 출근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팀원들에게 회의콜을 했고, 팀원들을 모두 모아놓은 채로 아침에 본인이 전송한 메일을
확인하라고 했다.
아침에 전송한 메일은 실장이 요청한 자료(팀원들의 성향에 대한 기술)에 대한 회신이었고, 팀원 모두가
본인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다른 팀원에 대한 팀장의 평가까지 볼 수 있게 날 것 그대로의 정보였다.
거기에서 팀원들은 본인도 채 파악 못한 본인의 특성(특히 단점)과 사람에 따라서 공개되는 게 민감할
아킬레스 건까지 기술되어 있었다.
가령, 전년에 진급이 누락된 대리에게는
'진급 시기 전년도에 이전 팀장에게 찍혀 인사 고과를 나쁜 등급을 받았으며, 금년도 진급 이슈에 민감함'
'자회사 출신이라 체계적으로 업무적인 트레이닝을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연차에 비해 업무 역량이 미달함'
등의 내용이 있었고, 당해년도 차장 승급 대상인 과장 또한 진급 이슈가 언급되어 있었다.
문서작업이 주 업무가 아니었던, 성격이 서글했던 다른 대리에게는
'호감형 인상이나, 문서 작성 등의 업무 처리가 미숙함'의 코멘트가 있었다.
나 또한 신입이라고 그러한 돌직구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그 메일을 보고 너무 당황스러움과 배신감에 하루종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메일엔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신입 공채로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직장 내 성희롱 이슈로 부서 이동'
'경직된 회사 분위기와는 달리, 패션에 꽤 신경 쓰고 다니는 편'
'직장 내 성희롱 이슈로 인해 부서 내에서 특별히 이슈가 없도록 신경쓰고 있음
원치 않게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라는 사실이 떠벌려진 데 모자라, 저 (괄호 안 단어들)의 의미를
나는 한참동안 고민했다.
- 내가 복장 때문에 직장내 성추행을 당한 거라는 건가?
- 나 처럼 입고 다니는 애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건가?
-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비겁한 변명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청반바지에 레깅스도 입고 다니던데,
왜 나만 이슈화 되는 거야?
-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한 사람들은 그럼, 똑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하는건가?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팀장의 메일에 회신을 했다. '당신은 아주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고,
복장 때문에 내가 당했던 일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얘기를 '본문의 어조에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부분이 우려스렵다'고 빙빙 에둘러 간곡하게 표현했다. (위아래 없이 솔직하다는 코멘트도 있었기에)
그러고는, 이 메일을 공유받은 다른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일까봐 걱정이 되며 표현에 대해서
조금만 더 유념해달라고 아주 정중히 메일을 보냈다.
그러고는 팀장은 메일을 확인한 후 몇 시 간 후에나 답신을 보냈다.
'그래, 알았다'
그러고는 팀원 전체에게 개별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이슈를 전체적으로 공유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구두로 하고 더 이상의 피드백은 없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추후에 알게 되었는데,
나에 대해서는 사무실 내에서 내가 이마에 '성희롱 피해자'란 각인을 쓰고 다니는 것 마냥 내가 당한 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가해자가 누구였는지는 이상하게도 되게 쉬쉬했다는 사실이다.
(팀장은 사내 어떤 사람으로부터 직장내 성추행을 당했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는가보다)
팀원들 모두 씁쓸해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