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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Jun 02. 2024

이민을 갔는데 갑상선 저하증이라니

나라를 바꿀 때마다 병이 따라온다

임신한 채로 호주로 이주했지만 다행히 뉴질랜드 영주권자로서 메디케어 혜택을 받았다. 아이 낳을 때 든 비용 $0. 산후조리도 집에서 했으니 정말 빵원이었다.


물론 처음에 의료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프라이빗 닥터에게 가보기도 했으나, 딱히 뭘 더 해주는 게 있는 것도 없이 상담 시간으로 진료비를 청구하는 것이 불편해 공립으로 바꾸었다. 더군다나 아기를 낳기로 한 공립 병원 주변에 있는 사립 병원에서 혹시 문제가 생기면 다들 공립 병원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그만큼 더 많은 의료진과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서라고 하니, 믿을만했다.


류마티스가 있는 점을 고려해 원래 미드와이프와만 상담하면 되는 걸, 공립 병원에서는 의사와도 약속을 잡아주어 이것저것 테스트를 하고, 임신 기간 내내 관리해 주었다.

 

첫째를 낳은 후 육아 휴직 기간 동안에는 태어나 손꼽히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대체로 날씨 좋은 시드니의 계절을 만끽하며,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적성에 딱이었다.


그 와중에 직장에 대한 고민도 늘어났다. 직장을 아예 다니지 않아도 된다면 더 좋겠지만 이왕 다닐거라면 통계 전공을 살려 날것의 데이터를 다루며 일하고 싶었다. 사실 아이 낳으러 가기 일주일 전까지도 온라인으로 머신러닝 강의를 들으며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막연히 그려보곤 했다.


결국 육아휴직 기간 동안 이직을 감행했다. 이전 회사에서 호주로 트랜스퍼도 해주고 서포트를 잘해주었지만, 하고 있는 일 자체의 한계, 업무의 깊이가 더 이상 깊어질 것 같이 보이지 않아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옮기는 것이 맞다고 느꼈다.




Long story short, 첫째가 9개월이 되는 때부터 시작한 두 번째 회사에서 7단계라는 억척스러운 면접 때 받았던 느낌으로 살짝 예상은 할 수 있었던, 스트레스에 허덕이는 2년을 보냈다.


데이터 사이언스 컨설팅 회사답게 업무는 하고 싶었던 일에 가까웠으나, 컨설팅 회사라는 이유로 하루 시간 단위로 무슨 일을 했는지 적으라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에 대한 압박, 클라이언트 앞에서는 무조건 Yes를 한 후 모든 뒤처리가 직원에게로 내려와 밤새서 뭐라도 해내야 하는 무자비한 업무 강도, 개인의 자율성이나 가족이 있는 삶을 인정해주지 않는 회사문화가 버거웠다.


어느 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갔다. 류마티스 때처럼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하시모토' 갑상선 저하증이라고 했다. 이 병 역시 류마티스 관절염과 같은 자가면역질환이었다.


면역 체계는 여전히 스스로를 공격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정신인 건 알고 있었으나, 몸이 곧이곧대로 반응하니 당황스러웠다.


가장 살고 싶은 도시에서 살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어디에 살고 있느냐 보다는, 하루하루 무엇을 하며, 어떤 상태로 살아가는가에 더 영향을 받았다. 온몸을 휘감고 울긋불긋 올라온 두드러기가, 마치 이제 좀 쉬고 싶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것이 맞지만, 이직을 하려면 현재 몸 담고 있는 회사가 있어야 더 수월하다는 점 때문에 쉽게 퇴사하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일하며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채워갔다.


어디를 가든 자기 하기 나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가능한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한 번의 유산 후 찾아온 둘째 임신은 선물 같은 소식이었다. 임신 기간 동안 평소보다 높은 dose의 갑상선 약을 매일 아침 복용하며 다짐했다. 둘째를 낳고 난 후 육아 휴직은 꼭 내가 지금 다니는 곳을 나갈 수 있는 기회로 써야겠다고.


삶의 질은, 이제 내가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 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며 발란스를 맞추어가며 살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한가에 있었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니 적어도 다음 단계를 위한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의 윤곽이 이전보다 더 명확해졌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아니고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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