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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Jun 05. 2021

평범하게 사는 것

Dumb Witness 벙어리 목격자, Agatha Christie

Companion 컴패니언으로 사는 여자들은 보통 바보들이지. 조금이라도 영리했으면 다른 직업을 가졌을 테니.
- 그레이너 박사, <벙어리 목격자> 중.


1920년대에서 70년대 - 애거서 크리스티가 소설을 써 왔던 이 시기에 여성의 사회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그랬지만)은 정말이지 빠르게 바뀌어서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파리에서 숙녀 교육을 받고 사교계에 데뷔한 사람부터 (<Elephants can remember>) 옥스퍼드에서 수학을 공부한 사람 (Lucy Eyelesbarrow <4.50 from Paddington>) 까지 다양한 배경과 직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좀 더 나열해 보자면 

- 왕립 지리학회에서 발표를 할 만큼 인정받는 탐험가 (<Five Little Pigs>),

-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을 경영하는 사업가 (<Evil Under the Sun>),

- 여러 분야의 예술가 (예를 들면 미스 마플의 조카인 레이몬드와 결혼하는 조이스는 화가다),

- 유명한 기숙학교를 운영하는 교장,

- 학교 교사, 대학 교수, 간호사, 의사도 적어도 한 명 (<Appointement with death>), 아 그리고 스파이 (<Cat among the pigeons> 그 외 다수), 소설가 (아리아드네 올리버!)...  메이드와 요리사, 가정교사, 웨이트리스, 그에 못지않게 많이 나오는 비서 (게다가 비서도 다양하다), 주부(레이디 포함. 이 쪽은 규모를 보면 소규모 사업장 정도를 운영하는 것과 맞먹지 않나), 목사 부인 (사실 목사보다 목사 부인이 일을 더 많이 하지 않나 싶던데...) 그리고... - 컴패니언.


왕실의 lady-in-waiting (시녀)에서 유래한 컴패니언은, 나이 어린 여성들의 평판을 위해 동행하거나 중년이나 노년의 여성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 고용주와 비슷하거나 약간 아래인 계층이지만 삶을 살아갈 경제적인 수단이 없는 여성들이 선택하는 직업이다. 중/노년 여성들과 함께하는 컴패니언이 하는 일은 비서, 심부름꾼(장보는 것부터 도서관 책을 빌려오는 것까지), 하녀장(손님이 올 경우 손님용 방이나 식사 같은 것을 챙긴다), 간호 등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주요 업무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감정노동이다. 경제적인 수단 - 물려받은 재산 같은 -도, 가지고 있는 다른 기술도 없고,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 정말로 그저 먹고살기 위해, 이들은 고용주가 터뜨리는 감정을 그냥 묵묵히 받아낸다. 컴패니언은 멍하고 재미없는 지루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건 원래 그랬다기보다는 감정의 쓰레기통 취급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쏟아지는 부정적인 감정의 홍수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면 뭔가를 뒤집어써야 할 테니.


이 아래부터는 <Dumb Witness 벙어리 목격자>, <The Nemean Lion 네메아의 사자> 내용/반전/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벙어리 목격자>는 빅토리안 레이디의 초상 같은 에밀리 아룬델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매우 엄격하고 권위적이며,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게 베풀어주고 보살피지만, 짧은 시간 동안 컴패니언들의 인생사를 뽑아내서 듣고 굴리다가 지겨워지면 해고하고 다시 고용하는 - 그러면서 great generousity로 대하기도 했다고 하니 보수를 잘 쳐줬나 - 자기 세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뭔가 떨어지는 거 없나 하는 조카들(테레사 아룬델, 찰스 아룬델, 벨라 타니오스와 그 남편)이 빙빙 돌고 있고 얘네를 그래도 가족이라고 - 권력을 휘두르는 재미도 있었겠지 - 내치지 않는 나이 많은 레이디.


몸이 어릴 때부터 약한 사람이 그런 경우가 많지만, 시름시름 앓으면서 고쳐 쓰다 보니 남매들 (언니가 3명이었나 4명이었나 있고 오빠가 하나) 다 죽고 혼자 살아남은 에밀리는 모두의 유산을 물려받는데 그걸 또 적절히 잘 투자해서 돈이 들어오고, 빅토리안 마인드로 살다 보니 돈도 별로 안 쓰고 뭐 그러다 보니 죽기 전까지 어마어마한 재산을 쌓는다. 그런데 죽기 직전에 다시 썼다는 유언장에 그 재산을 컴패니언인 미니 (=Wilhelmina "Minnie") 로슨에게 다 넘긴다, 라는 너무나 에밀리 답지 않은 유언을 남겼는데...


그러면, 누가 범인일까요.


사실 이게 살인은 맞나부터 물어야 한다. 에밀리 아룬델은 나이가 많고, 늘 시름시름 앓았으며, 몇 달 전에도 거의 죽다 살아났고 그때와 같은 증상으로 앓다가 죽었다. 우리의 헤이스팅스 씨는 (그렇다 이 소설은 헤이스팅스가 나온다) 초반부에 이게 살인 일리가 있냐 너(=푸아로)는 그냥 다 살인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야!라는, 사실 지극히 말 되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이게 살인이 아닐 리가 없지 않냐고 한다. 역시 헤이스팅스.)


그럼 푸아로는 왜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가 하면 - 편지를 받았는데 날짜가 이상해서.


푸아로는 6월 28일에 에밀리 아룬델이 4월 17일에 쓴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는 빅토리안식 퍼즐 같은 (헤이스팅스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투덜거린다) 내용이지만 푸아로는 흥미를 느끼고 (특히 날짜에. 그냥 우편사고(...) 일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내가 아마존에 주문한 책을 한 달도 더 넘게 지나서 받았다고 이러는 건 아니다.) 리틀 그린하우스(에밀리 아룬델의 저택)를 방문하지만 에밀리 아룬델은 5월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우선 헤이스팅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겠다. 재미없다고 해서 미안해요 헤이스팅스.


<Dumb witness>는 분명 읽었는데 (읽었다고 킨들이 알려줬다. e북의 편한 점. 샀던 책/읽은 책을 알려준다) 어째서인지 중간까지 읽은 기억이 전혀 안 났다. 덕분에 헤이스팅스의 또 다른 기능을 그냥 잊고 있었지 뭐야. 반려견 언어 번역 기능이 붙어있었어 이 사람...


에밀리 아룬델의 반려견 Bob의 역할은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가장 중요한 동기를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서 제공하긴 하는데 (덕분에 억울해지는 사람이 적어도 둘)... 으음 어쨌든 귀여워. 헤이스팅스가 번역을 너무 귀여운 방향으로 해서 그런가. Bob의 습관 - 공을 물어다가 계단 위에 두는 - 은 확실히 위험하다. 누구 죽이려고 저래 싶으니까. 하지만 개입니다. 그냥 놀아달라고 하는 거잖아. 사람이 잘못했네.


한 밤 중에 잠이 안 와서 집안을 배회하던 에밀리는 계단에서 미끄러졌지만 기적적으로 좀 긁히고 -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 끝난다. 다들 Bob의 공을 밟은 거라고 하지만 침대에 누워 그 상황을 복기해보던 에밀리는 깨닫는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했어.


상어 떼 같은 조카들이 다 집에 있는 상황이니 그중에 하나가 범인이겠고 누군지도 알 것 같지만 가문의 명예가 있으니 경찰은 못 부르겠고...

빅토리안에게 그런 멍청한 낙천주의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당연히 가장 나쁜 경우를 가정한다.
에밀리 아룬델은 최악의 경우를 믿는다.
- <벙어리 목격자>

고민하다가 조카들이 괘씸해서 유언장을 고치고 푸아로에게 편지를 쓰지만 그 편지를 잘 넣어두고는 잊어버린다(...). 하지만 에밀리가 죽고 난 후 어찌어찌 그 편지는 푸아로에게 가게 되는데.


아마 유언장은 나중에 다시 고칠 생각이었겠지만 그전에 죽어버렸으니 모든 재산은 컴패니언인 미니 로슨에게로 가고 상어 떼 같은 조카들과 미니 로슨의 대치하는 상황에서 푸아로가 덜컥 나타난 것.


애거서 크리스티는 보편적인 그림을 각각의 캐릭터에게 부여해서 "아 이런 사람..." 하는 익숙함을 먼저 제공한다 (<Agatha Christie's Women>, M. Vipond). 사교계의 나비인 테레사 아룬델, 그 테레사가 사랑에 빠진 연구에 진심인 의사 도널슨, 자잘한 범죄 (영국 소설에서 이런 애들은 꼭 이튼이나 옥스퍼드에서 수표 사기 치는 걸로 인생을 시작하더라)로 인생을 메꾸면서 가끔 해외도피도 하며 사는  테레사와 남매인 찰스 아룬델, 얘네들 사촌인 벨라 타니오스, 벨라의 남편인 그리스인 (가끔 터키인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음. 계속 얽혀왔던 동네이니. 그러고 보니 아테네에서 그리스식 커피를 주문했더니 이스탄불에서 터키식 커피라고 불렀던 게 나왔었다.) 의사 타니오스. 벨라 부부는 두 아이와 스미르나에서 살지만 잠시 영국에 와 있다. 타니오스 박사에 대한 영국인들의 외국인 불신은 진짜 좀 눈물 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범하게 착하지만 재미없고 멍청하다는 평을 듣는 컴패니언 미니 로슨.


푸아로는 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대화를 하면서 껍데기 안쪽을 들여다본다. 푸아로는 도널슨 박사에게 '약혼녀를 기니어 피그처럼 묘사한다' 고 하지만, 저기 푸아로 씨 당신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하지 않나요.


미스 마플도 그렇지만, 푸아로가 A는 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하는 건, A가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다. A는 이런 종류의 살인을 하지 않는다 쪽인 것. 예를 들어, A는 누군가와 격하게 싸우다가 '사고'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계획해서 냉정한 상태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형태의 살인은 저지를 수 없다는 것. 계획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지는 못한다 - 고. 계획을 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그 계획에 사용된 것에서 그 밑그림을 그린 사람을 추측한다. B는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없다, 라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캐릭터 붕괴는 있을 수 없다 라는 거죠 이거...?


여기서 헤이스팅스의 불행이 시작됩니다. 범인후보들이 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불쌍하게도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헤이스팅스는 수사 진행될수록 모든 사람이 범인인 거냐고 한탄하게 된다. 저런... Bob이 종종 등장해서 다행이지. 힘내라 반려견 통역사 헤이스팅스.


그리고 컴패니언.


<네메아의 사자>에서도 그렇지만 컴패니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막말'을 한다.

아미 카나비요? 아 그녀는 괜찮아요. 착한 사람이죠, 멍청하지만. 여러 컴패니언들을 고용했었는데 그들은 다들 멍청했어요. - <네메아의 사자>

(foolish, fool을 멍청하다로 번역하는 게 맞나...) 그 컴패니언 캐릭터에 대한 반전이 <네메아의 사자>의 반전이기도 하다. 미니 로슨에 대해서도 그렇다. 컴패니언들은 감정노동에 오래 지쳐있고, 똑똑하게 굴면 오히려 인생이 더 힘들어질 테니 표정이나 말투 행동이 저렇게 "컴패니언에 맞게" 수렴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크리스티 소설에는 정말 반짝 거리는 여성 캐릭터가 꽤 나온다.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똑똑하거나 매우 아름답거나 아니면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던가. 그녀들의 삶이 꼭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녀들은 뭐랄까, 자신의 일부분을 드러내고 행동하고 그런 것을 어느 정도 허락받았다, 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어서, 컴패니언으로 사는 여성들은? 그녀들은 끊임없이 감정 공격에 시달리고 나이 들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한다. 나는 그녀들에 대한 무신경한 비판 (이 글 처음에 인용한 그레이너 박사의 말 같은) 이 싫다.


크리스티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그런 무신경한 비판을 보여주지만 크리스티 특유의 따뜻함으로 그녀들의 삶을 보살펴준다. 에필로그에서도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게 된 미니 로슨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보이지 않지만 (상황 정리 정도로 끝), 스스로를 찾아서 잘 지내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바란다.


Despite the fact that she wrote in a form which demanded stereotypes and caricatures, Christie was not a generalizer. She knew more of life than that. That is why her books give a surprisingly accurate picture of the life of twentieth-century women.
- <Agatha Christie's Women>, M. Vipond



Dumb Witness, Agatha Christie

The Nemean Lion (The Labours of Hercules), Agatha Christie

Agatha Christie's Women, M. Vipond, Concordia University

Companion, Wikipedia

Christie's Celebrated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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