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함과 말랑함 사이에서 만난 까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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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화산 기둥 같은 디저트를 처음 먹어본 건 고등학생 때였다. 친구가 먹어보고 싶은 디저트가 있다며 나를 카페로 데려갔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까눌레”라는 디저트를 알게 됐다. 까눌레는 프랑스의 전통 과자로, 전용 틀 안쪽에 밀랍을 발라 구워내는 디저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한 식감이 인상적이다.
솔직히 첫 비주얼은 그다지 호감적이지 않았다. 겉이 온통 까무잡잡한 것이 꼭 탄 과자 같았다. 친구가 포크로 겉을 톡톡 두드릴 때는 괜히 긴장도 됐다. "탁탁" 저 까무잡잡한 것 안에는 도대체 뭐가 있길래 이런 소리가 나는 걸까.
"이거... 딱딱한 거야?"
항상 부드럽고 퐁신한 빵이나 바삭한 쿠키만 먹어왔던 나에게 까눌레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내 불호를 깬 건 순식간이었다. 친구가 나이프로 조심스레 반을 가르자, 까맣고 단단해 보이던 겉과는 다르게 말랑하고 촉촉해 보이는 노란빛의 속이 나왔다. 어라? 안에는 질감이 다르네? 새로운 비주얼과 함께 호기심이 커져갔고, 경계심은 사라졌다. 포크로 콕, 찍어 코에 먼저 가져다 댔다. 음, 기분 좋은 달큼한 바닐라 향.
한 입 베어 물자, 바삭한 겉과 쫀쫀한 속이 느껴지는 재밌는 식감이 나를 반겼다. 더불어 입 안에서는 바닐라 빈 맛이 부드럽게 퍼졌다. 탁탁 소리가 날 만큼 바삭했던 겉은 바삭을 넘어서 빠작한 식감이었다. 안에는 또 왜 이렇게 촉촉하고 부드러운지.
역시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겉모습만 보고 경계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 작은 한입에 내 행복이 가득 담긴 기분이었다. 단단한 겉과 달리 부드러운 속이 어쩐지 내가 생각나기도 했다. 단단해지려 노력하지만 막상 속을 파보면 아직 한없이 무른 나. 처음 만난 까눌레한테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한 동안 까눌레라는 디저트 자체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다시 만나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우연히 들린 다른 카페에서 오랜만에 까눌레를 마주했다. 그때와 변함없는 까무잡잡한 비주얼. 반가운 마음에 냉큼 골랐다. 오리지널 바닐라 맛은 저번에 먹어봤으니까 이번엔 향긋한 얼그레이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슥슥 잘라 한 입 먹어봤는데, 그때의 감동이 안 나왔다. 얼그레이의 향긋함이 좋긴 했지만 기억 속 그 맛이 아니었다. 빠작한 식감은커녕 질깃하고 눅눅한 겉과 질척이는 속까지. 아, 실패다.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실망감에 괜히 애꿎은 기억까지 탓했다.
그 이후로 여러 번 실패했다. 반복되는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기준이 올라가 버렸다. 맛집을 찾아가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서 맛집이라고 하는 곳도 가 봤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먹었던 날도 완벽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날의 까눌레가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작은 것 하나에도 행복을 느끼던 내 마음 때문 아니었을까. 다시 만난 까눌레가 마음에 안 들었던 이유는 여러 상황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내가 부정적으로 다가가기 때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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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까눌레는 나의 최애 디저트가 되었다. 이제는 까눌레를 그때보다 훨씬 자주, 다양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카페에 가기 어려우면 집으로 배송받을 수도 있다. 집에만 있어서 별거 없는 하루인 것 같은 날, 내가 좋아하는 컵에 인스턴트 아메리카노를 타고 예쁜 그릇에 까눌레 하나를 담아 먹으면 그 자체로도 꽤 괜찮은 하루가 된다. 작은 디저트 안에 하루를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크게 들어가 있다. 이런 늘어지는 하루도 괜찮다며 위로해 주는 기분이다.
이제는 맛이 뛰어나지 않아도 아쉬움이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까눌레를 먹은 하루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우니까. 한입 한입 사라지는 게 아까운 디저트, 내 행복을 책임지는 까눌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