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영어로 불러주는 이 옛 동요.
"Row, row, row your boat,
gently down the stream,
Merrily, merrily, merrily, merrily,
Life is but a Dream."
저어라, 저어라, 그 인생의 배를 저어라.
험하고 긴 길이언정 그저 흘러내려가는 억센 물결에 의지해.
그래도 행복하게, 즐겁게, 밝게, 웃어제껴라.
이 삶, 꿈에 지나지 않을 뿐.
임신 39주 4일째.
(이 에세이를 쓴 시점은 2020년 9월 초입니다.)
캐나다에서 13년째 살고 있는 내 한국 나이, 서른일곱에 갖는 셋째.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필리핀에서 유학시절 중에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캐나다인 남편 사이에서 생긴 큰 아들은 벌써 초등학교 6학년.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
초조한 마음으로 오늘내일 출산일을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속 그 동요가 잔잔히 흐른다. 특히 삶은 단지 꿈일 뿐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수십 번, 수백 번 혹은 수천번 감아서 듣고 또 들어 늘어난 카세트테이프의 어느 한 구절처럼 느리게 반복된다.
삶은 정말 무엇일까.
작년 크리스마스 얼마 전, 남편의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살고 계시던 부엌 바닥에 무의식으로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발견한 지 하루만의 일이었다.
할머니의 성함은 'Rose(로즈)'.
잘 울지 않는 남편이 그녀의 시신이 담긴 관을 들고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말했다.
"she was a such a good woman."
(그 여잔 정말 참 좋은 여자였어요.)
나도 동감한다. 그녀는 참 좋은 여자였다. 칠 남매(씩이나)를 낳고도 바람을 하도 많이 피운 남편을 떠나 유치원 선생님, 싱글맘으로 넉넉지 않은 형편에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았어도 항상 행복한 듯 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던 그녀가 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한 땀 한 땀 뜨개질한 스웨터와 양말, 이불을 선물로 받는 것은 내가 이곳 캐나다로 온 지난 2007년부터 내게는 마치 나만의 작은 크리스마스 전통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찰나, 가까운 가족들조차 가늠하지도 못했던 그녀의 병고와 사망 소식도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장례식 비용부터 조문 온 사람들 대접 비용까지 자신이 미리 다 지불해 놓고 자신의 죽음을 예비해 온 그녀의 대담함과 온화함, 비범함에 다시 한번 더 놀랍고 더 슬펐던 그날, 장례식에서 돌아온 그날 밤, 한국에 계신 내 친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단 연락이 왔다.
고 김순례 권사님.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시골의 땅과 집을 담보로 잡아하던 사업이 망해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새엄마를 매일 이유 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런 폭력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가출한 이후엔 나도 취한 아빠의 폭력의 타깃이 되어 온 몸이 멍으로 뒤덮여 부끄러워 학교도 가지 못했고 그때부터 더 지독해진 술 중독으로 인해 간경화가 온 아빠가 돌아가신 뒤 갈 곳 없는 손녀딸을 거둬 십여 년간 키워주신 나의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벌써 3년 전의 일.
스물한 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엄마를 만나 할머니 품을 떠나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유학길에 올라 한국을 떠났다가 십 년 동안 한국을 떠나 살다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처음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한국에서 나를 가장 반기고 장하다 여긴 것은 역시 할머니였다.
캐나다에 사는 십여 년 동안 친엄마와는 연락을 진즉에 끊었고,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 돌아간다면 맘 편히 찾아갈 곳도, 사람도, 할머니뿐인 나에게는 사실 있어보지 않은 엄마라는 존재보다 더 중요했고 그녀는 또한 긴 이민 정착기간 동안 정신적인 지주로, 아빠가 살아계셨던 동안 받았던 어린 내가 받았던 고통을 치유해 주고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날 키워내 준 내 인생에 가장 고마운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떠나는 모습은 꼭 봐야만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연말연시라 비행기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있어도 너무 비쌌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2020년 1월 첫 주, 홀몸으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한국에 할머니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실체'가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가슴 아린 일이 있을까.
그리움은 구름 같은 것.
그리움은 먼지 같은 것.
한국에서의 짧은 2주를 보내고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온 다음 날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이상하게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임신이었다.
두 줄이 선명하게 그어진 임신테스트기를 보고 엉엉 울었다. 새 생명을 인지하는 기쁨의 울음이라기보단 인생 더럽게 실패한 어느 구질구질한 시점에 눈물 콧물 다 빠지게 우는 그런 울음이었다.
셋째를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첫째와 둘째가 훌쩍 자라 편한 지금 다시 계획해 아이를 낳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었고, 남편의 할머니, 나의 할머니를 동시에 잃어 슬퍼하는 중 알게 된 임신이 기쁘지도 행복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 이미 뱃속에 자라고 있는 태아에겐 미안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대미문의 전 세계 봉쇄가 이뤄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입덧은 예정일을 코 앞으로 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입덧은 아기 낳을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쿨럭)
임신테스트기를 남편에게 보여주자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We just lost two of our precious grandmothers in our lives. If this means something, I think this baby is going to be a girl."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두 분의 할머니를 보내고 얻은 이 아이는 왠지 딸일 것만 같아.)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so, if it is, do you want to name her after our two grandmothers?"
(그래서 말인데, 네 뱃속 아이가 만약에 진짜 딸이면 우리 두 할머니의 이름을 섞어 짓는 건 어때?)
곧 태어날 아이는 여자아이이다.
나랑 똑같은 쥐띠, 두 할머니의 성함, 남편의 할머니 이름인 로즈와 김 씨이셨던 할머니의 성을 조합해 이름은 "Rose Kimbery Bartlett(로즈 킴벌리 발틀렛)"이라고 짓기로 했다.
딸의 엄마가 되는 것은 아들들의 엄마로 지내는 것과는 얼마나 다를까.
거짓말, 혹은 드라마 같은 일들이 번복해 일어나는 2020년의 끝자락에 나는 이 순간들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배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출산의 고통 끝에 내 가슴 위에 올려졌던 시뻘건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기억한다.
'삶은 꿈일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우연과 운명으로 복잡하게 얽힌 현실일까?'
곧 태어날 아이에게 아마 많이도 불러주게 될 그 동요가 내 머릿속, 가슴속에서 조용히 재생된다.
그리고 지금은 2022년 7월.
로즈가, 딸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