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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Mar 31. 2022

Essay #5

좋은 신발

백화점에 구두를 사러 갔다. 출근한 지 2-3주째쯤이었다. 검정색 구두가 이미 있었기에 구두를 굳이 사야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완강했다. 취업 축하 선물로 받은 백화점 상품권으로 구두를 사야 한다고 했다.


절대 내 선택으로 사지 못할 금액의 구두를 샀다. 심사숙고해서 고른 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매장으로 성큼 들어갔다. 편해보이는 구두를 하나 골랐고, 신어보라고 했다. 구두를 신고 걸어보라고 하며 어떤지 물었다. 좋다는 말 한 마디에 바로 그 구두를 결제했다.


몇 주 뒤, 집에 가니 현관문에 남자 구두가 있었다. 내가 첫 월급으로 동생에게 사주려던 구두였다. 동생은 자기도 모른 새 엄마가 구두를 사주었다고 했다. 신어보니 좋아서 지금처럼 엉망인 스타일로 신기에 창피할 정도라고 했다.


의아했다. 당신은 티셔츠 한 장도 쉬이 사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밥을 사거나 머리 비용을 내는 것도 신경 쓰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리는 사람이다. 유난히 비싼 신발을 선뜻 구매한 적이 없었다. 돈을 버는 식구가 늘어서였다고 할 수 없었다. 그 돈은 당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의 구두를 본 날 당신과 거실에서 옛날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은 유난히 사회초년생일 때, 직장을 다녔을 때 이야기를 자주 한다. 면접 때 이사님이 좋게 봐주신 이야기부터 결혼하면서 여직원 중 처음으로 회사에서 축의금을 거하게 받은 스토리까지 에피소드가 여러 가지다. 내가 20살이 넘어서부터 들어왔기에 대부분의 에피소드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새로운 에피소드가 나왔다. 당신은 부모님의 이사, 동생의 첫 컴퓨터 등 집안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다. 정작 취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신이 처음 산 구두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새끼발가락이 안으로 들어갔고, 아킬레스건 살은 까지기 일쑤였다. 당시 사회초년생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처쯤은 있었다고 했다.


한편, 아픈 발을 보며 다짐했다고 한다. 나중에 내 자식은 무조건 처음 신발은 좋은 거 신겨야지.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따스하면서도 한구석이 아려왔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그녀의 발은 엉망이었다. 30년이 지나 그녀의 아들딸은 좋은 신발을 신었다. 새끼발가락이 아프지 않았고, 아킬레스건 살이 찢어지지 않았다.  


25살의 그녀는 아픈 발을 보며 ‘누구나 이 정도는 아프지.’ 라고 생각했다. 30년을 살며 그때 아픔을 기억했고, 그 아픔을 물려주지 않았다. “옛날에 내가 이만큼 고생했으니, 너가 그맘때 그 고생을 하는 건 당연해.”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말로 당신의 지난 세월을 내게 겹쳐보지 않았다.


25년을 살며 30년간 그녀가 품어온 다짐을 몰랐다. 25살의 내가 아픈 발을 보며 ‘다들 이 정도는 아프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게, 오히려 ‘왜 엄마가 좋은 신발을 사주지?’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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