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부터 끝내야죠?..?
나: 박사님, 저는 졸업이란 걸 할 수 있을까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그 전에도 공부를 제대로 한 건지 모르겠어요...
박사님: 저도 늦게 시작했는데 졸업했어요. 할 수 있어요! 그거 알아요? 석사가 학사보다 자신감이 낮대요. 박사가 석사보다 낮아요. 교수가 되면? 박사보다는 오르지만 석사보다 낮을지도 몰라요.
논문 미팅에서 나온 직후, 논문 디벨롭을 도와주시는 박사님께 내 한탄을 털어놓고 말았다. 막막한 불안감이 차다 못해 넘쳤다. 논문 미팅을 준비하는 내내 나는 고장난 시계였고 깨진 독이었기 때문이다.
고장난 시계가 하루에 딱 2번 맞듯이, 내 논문 진행은 수많은 시도 중 한 두 번 맞을까 말까였다. 시간을 쏟아부어 내 머리를 채우려 해도, 내 머리가 깨진 독인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더딜 수가 없다. 이렇게 안 채워질 수가 없다! 잠은 점차 줄어들었고, 잠을 줄여도 마음은 계속 졸였다.
웃기게도 부서진 시계이자 독에 가득 채우는 건 짬뽕이다. 학부 때 교육을 전공했고, 졸업한 뒤 HR 업무를 하다가, 지금은 건강을 연구하는 대학원에서 인구학을 공부한다. 그 탓에 어딜 가나 설명해야한다. 왜 학교로 안 가고 회사로 갔는지, 왜 회사에서 일하다가 공공 보건 쪽으로 왔는지. 사람들의 질문은 내 안에 오래 남아 돌아다닌다. 민간과 공공, 교육과 HR과 인구, 이 모든 게 뒤섞인 렌즈로 세상을 보는 돌연변이는 무엇을 연구해야 할까?
별별 글을 닥치는대로 읽는다. 논문이라 하면 보건, 심리, 조직, 사회, 교육 가리지 않는다. 읽다보니 네트워크나 복잡계가 걸려서 물리나 생명 분야의 책까지 넘어간다. 현상 이면에 구조는 경제를 모르니 이해가 안 된다. 그럼 또 경제 책을 펼친다. 이렇게 한참 논문과 책을 오가다 보면 머리가 이론으로 차갑게 끓는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 떠오른다. "책은 우리를 좋은 의미에서 차갑게 만들어주고,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우리를 뜨겁게 만든다."
차디찬 머리는 위험하다. 세상과 조금씩 멀어진다. 일상 대화에도 더 정확한 용어를 써야 찜찜함이 남지 않는다. 사건과 사고를 볼 때 쉽게 입이 안 떨어진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저 일이 잘못 됐다고 말하기 위해 어디가 잘못됐으니 왜 그리고 어떻게 고쳐야 한다는 생각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점 입을 다물고, 입만 열면 어려운 말만 내뱉는다. 그러니 다른 자극이 필요하다.
또다시 별별 세상사를 닥치는대로 보고 읽는다. 뉴스레터, 뉴스 기사, 롱블랙과 폴인 아티클,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마구 본다. 상반기에 31권의 책을 읽었는데, 그 중 12권은 공부에 관련 없는 책들이다. 평소에 눈길도 안 주던 소설과 차일피일 미루던 글쓰기 책들이다. 저번 글에서 느낀 바(읽기와 쓰기는 다르다)처럼, 가득히 채운다고 논문이 툭! 나오는 게 아니다. 일단 소화한 콘텐츠를 내 방식대로 말로 글로 끄집어내야만 한다.
잡학박사가 되어간다. 잡학박사 희망자의 일상이 조금씩 바뀐다.
1. 과거의 나는 읽을거리 편식이 있었다. 강경 비문학, 주로 경영/경제와 약간의 과학. 지금은 무경계다. 책 분류 000번대(총류)부터 900번대(역사)까지 두루 읽는다. 오프라인(책, 잡지, 기사 등)과 온라인(논문, 아티클, 웹페이지 등)도 구애받지 않는다. (p.s.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이리나 스팔코가 생각난다. 사진 참고!)
1. 과거의 나는 커피 향만 맡으면 두통에 몸서리쳤다. 지금은 라떼 없이 하루가 이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시작은 해도 수많은 글자가 눈에 들어오다가 어느새 튕긴다. 그때다. 몸이 라떼를 찾을 때.
2. 과거의 나는 출퇴근 시간에 on/off 스위치를 눌렀다. 지금은 on/off가 없다. 아침-오전-오후-밤-새벽 가리지 않고 읽고 쓴다. 에어팟, 헤드셋, 컴퓨터, 충전기, 버티컬 마우스. 이 세트면 언제 어디서든 집중한다.
3. 과거의 내 스케줄은 업무 패턴에 맞췄다. 지금은 내가 계획하고 진행하고 마무리한다. 구글 캘린더, 노션, 플로우, 슬랙, 구글 드라이브, 드랍박스. 이 덕분에 인터넷만 터지면 스케줄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