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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즈 Jun 11. 2021

'사라지게' vs. '살아지게'

단오희망등 만들다가 생긴 일

'사라지게 해 주세요' vs. '살아지게 해 주세요'

발음은 비슷한 두 서술어를 바꿔 썼다면?


 

 며칠 전 지역 문화원에서 하는 단오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코로나 시대인 만큼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몇 가지 행사 중에 우리는 단오체험팩을 신청하게 되었다. 문화원에서 주는 재료를  수령한 후, 안내 영상을 보며 장명루, 희망등 같은 기념품을 만들어 보는 활동이었다. 우리 집 둘째 주니가 희망등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A4 정도 크기 나무 재질의 만들기 키트를 꺼냈다. 사인펜으로 구성품에 색깔을 칠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우리 집 주니는 만들기나 그리기 할 때 거침이 없다. 소심한 나는 색 하나 고를 때도 이 색이 좋을까 저 색이 좋을까 한 열세 번쯤 고민하곤 한다. 그에 반해 주니는 망설임 없이 사인펜을 하나 쥐고 그대로 돌진하며 해내고 있다. 이 색 저 색 바꿔갈 때도 머뭇거림이란 게 안보이니 내 입장에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 색을?... 저 색이 나은 건 아닌가? 속으로 말하며 머릿속으로만 참견하고 있다. 그런데 완성을 해놓으면 또 그럴듯하니 색끼리 어울린다. 그리기란 원래부터 정답이 없는 거라서, 무엇을 그리든 어떤 색을 칠하든 일단 완성을 하면 그럴 듯 해 지는 건가? 다 칠했다며 나의 반응을 기대하는 아이에게 진심 한 방울 담긴 칭찬의 말을 건네주고 조립해보라고 했다.


 주니는 나무 조각들을 판에서 떼어낸 후 조립해갔다. 연결부위가 빡빡하게 되어있어서 쉽지 않았다. 잘 안되니 툴툴거리다가 제 손을 망치 삼아 두들겨 댄다. 앗.... 부서지면 어떡해....라는 나의 소심한 중얼거림은 주니가 주먹을 내리치는 쾅쾅 소리에 금세 묻히고 만다.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작은 희망등이 청사초롱을 닮았다. 집안 여기저기 가지고 다니며 뿌듯해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편안한 만족감이 밀려온다. 잠시 스쳐가는 행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참 한 가지 빠뜨린 게 있었다. 희망등에 '희망쪽지'를 써서 매달아야 완성되는 거였다. 아이에게 알려주니 다시 앉아서 종이를 손으로 가리곤 뭘 열심히 끄기적 거린다. 그냥 써도 되는데 뭘 손으로 가린담... 무어라고 쓰는 걸까.. 궁금해하는 걸 들키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자꾸 고개를 빼게 되는걸 겨우 참았다.


 다음 날 아이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렸을 때 희망등에 달아둔 종이를 쓱 뒤집어 보았다.

1. 누나랑 사이좋게 살게 해 주세요. 2. 발 쿵쿵 문 꿩꿩 등등 습관들이 살아지게 해 주세요.

사실 나는 뭐가 갖고 싶다거나 어디를 놀러 가고 싶다는 정도의 바람을 썼겠지 생각했다. 짐작과는 퍽 다른 내용이었다.

 우리 집 이 년 터울의 두 아이는 성격이 꽤나 다른 편이고 다툼도 잦다. 하루에 한 번은 말싸움이 나고 신경전이 벌어지곤 한다. 여태 이를 중재하는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다. 정작 다툼의 당사자인 아이들도 힘들 거라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소원으로 쓴 것을 보니 나름의 큰 고민거리였나보다. 특히 둘째 아이 주니는 감정에 매우 솔직한 모습을 보인다. 좋게 말해 그렇다는 거고 다툼이 생겼을 때 화를 삭이지 못해 발 쿵쿵 문 쾅쾅하며 방에 들어가 버리곤 했다. 말이나 능력치로 매번 밀리니 분하긴 하겠지. 그래도 화를 표현하는 방식이 과하니 나는 이를 지적하게 된다. 아이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분한데 엄마한테 혼나서 억울함도 더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 발 쿵쿵 문 쾅쾅 습관을 고쳐야지.... 이제 열 살이니 그럴 나이가 되었지. 그런데 '사라지게 해주세요' 라고 쓰려고 했을 텐데? 아직 맞춤법을 자주 틀리는 아이는 '살아지게 해주세요'로 쓴 것이다. 몇 차례 다시 읽으며 헛웃음이 비져 나왔다. 문자 그대로 하면 계속한다는 거잖아? 희망등에 달았는데 이거 쓴 데로 이루어지면 어쩌냐? 습관 고치기에 앞서서 한글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거였어...


 그 날밤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에서 이 얘기를 해주었더니 한참을 배를 잡고 웃는다. 응? 웃으라고 한 얘기가 아닌데 난 진지하다고... 남편이 웃는 걸 보니 결국 나도 따라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열 살에 이런 맞춤법 틀리는 거 고민거리 아닌가. 아니 공부할 거리인가.

 가끔은 아이들과 끄기적거리는 기회를 가져야겠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의 속마음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내가 놓친 부분을 찾아내서 보살펴 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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