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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순 Aug 22. 2022

두 번째 생일이 다가온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춥고 시렸다.

갓 100일이 지나 고개를 겨우 가누기 시작한 아기를 안고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차가운 베란다 창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목 늘어난 수유티를 몸 가죽처럼 입고 멍하니 서있는 나와 달리 밖의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몸을 움츠리며 저마다 갈 곳을 찾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창 하나를 두고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나.

그 차이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밖과 보일러의 따뜻한 온기가 후끈거리는 집 안의 온도차만큼이나 컸다. 우이 스며들어 찬기가 올라올까 아기를 더 감싸 안으며 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너무 추워서 나갈 수가 없어. 하지만 따뜻한 봄이 되면 엄마랑 함께 꽃 보러 가자. 우리 동네에는 벚꽃이 참 많아서 봄이 되면 정말 예쁘거든."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더해져서인지 겨울은 하루하루가 참 더디게 흘러갔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이내 따뜻한 봄이 되었고 그토록 바랬던 꽃구경도 해냈다. 알록달록한 꽃이 참 예뻤던 봄은 아쉬울 만큼 아주 잠시 머물다 떠났고 무더운 여름이 이내 자리 잡았다. 아침 산책길마다 날 기분 좋게 했던 선선한  봄 공기는 이내 습기를 잔뜩 머금고 나와 아기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되어 맺혔다.

나는 겨울이 지나가길 바랬던 것만큼이나 여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랬다. 답답한 집구석에 나와 잠시라도 산책을 하며 숨을 돌리려면 아기가 힘들지 않게 날씨가 좋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지금 2022년 8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여름이 서서히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 일 년 전 내 아기가 태어났던 그 초가을의 잊지 못할 9월이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내 딸이 태어난 2021년 9월 17일은 내 인생에 가장 뜻깊은 날이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 그날은 내 딸의 생일이자 내가 처음으로 엄마가 된 나의 두 번째 생일이기도 하다. 그날이 얼마나 내게 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표현 할 기회가 생기면 이렇게 말하자고 늘 생각해 왔었다.


요즘 웹툰과 웹소설에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주인공이 과거로 다시 돌아가 복수를 하는 소위 말해 '회귀물'이 많다. 나는 그 정도로 억울한 삶을 살진 않았지만 만일 내게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지 이 쓸모없지만 흥미진진한 고민을 자주 했었다


'미리 답안지를 다 외우고 수능날로 돌아가서 서울대 의대를 갈까?'

'코인 열풍이 불기 직전으로 돌아가서 비트코인을 잔뜩 사두자.'

'그때 못 산 집이 눈에 아른거려. 부동산이 난리 나기 전으로 돌아가서 전세 끼고 대출 왕창 받아서 집 한 채 더 사두자. 그러면 부자가 될 수 있어.'


별의별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내 고민은 2021년 9월 17일 이후로 끝이 났다. 절대 바뀌지 않는 기준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 해도 나는 무조건 2021년 9월 17일, 우리 딸이 태어난 날 이후야. 내 딸이 없는 삶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리 내가 더 성공할 수 있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


2021년 9월 17일의 나는 서울대 의대를 진학하지도 못했고 부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산모였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내 딸을 만났다.


갓 태어난 딸은 참 작고 따뜻했다. 우리는 잠깐의 인사를 하고 헤어졌고 나는 입원실의 침대에서도 쉽게 잠을 들지 못하고 내 딸을 만날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리고  저녁 6시 반, 아기를 볼 수 있는 면회 시간이 되자 나와 남편을 포함한 엄마 아빠들은 모두 줄지어 신생아실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아기를 낳은 직후라 무척 힘들고 고단 했겠지만 다들 나처럼 아기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아픈 몸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마음이 갓 끓여낸 하얀 순두부처럼 따뜻하고 몽글몽글해진다. 병원이란 게 원래 축하받고 기뻐할 일이 별로 없는 곳인데 산모들로 북적이는 그곳만큼은 귀 따가운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섞여 정신없는 와중에 행복과 웃음이 넘쳐났다.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다면 꼭 돌아가고픈 날, 그날 나는 엄마로서 다시 태어났고 그날은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생일이 되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나는 '돌준맘'이 되었다.

아기의 돌이 채 한 달이 안 남은 지금, 여름이 한걸음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설수록 일 년 전의 그 행복했던 날의 기억이 다시 생생해진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채 떠나지 못한 더운 볕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초가을의 냄새가 다시 떠오른다. 팔 하나에 안겨도 남을 만큼 작은 내 딸을 안고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이 다시 떠오른다.

난 일 년 동안 모든 게 서투른 초보 엄마 곁에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준 내 딸이 무척 대견하고 고마워지고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진다.


우리 딸이 첫 돌을 맞이하는 2022년 9월 17일에는 2인분의 축하를 받고 싶다.

우리 딸의 생일을, 그리고 엄마로 태어난 나의 두 번째 생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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