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 May 18. 2022

20년 동안 잘 지냈어요, 모두.

ep107. 조소정 - 안부


2022년 5월 5일, 여느 어린이날과 다름없는 이 날. 20년 전 수원의 한 초등학생이었던 30대들이 모두 어린이로 돌아갔던 날이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이야기. 그중 한 사람으로서 소중한 추억을 잊지 않고자 이 공간에 적어 소개하고자 한다.


20년 동안 다들 잘 지내셨나요?


2002년 5월 2일, 수원 신성초등학교에선 운동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솜사탕과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들이 정문 앞에 즐비했고, 가족들의 손을 잡고 노란 체육복을 입으며 등교하던 여럿의 어린이들. 그리고 그 가운데 나의 모습. 엄마의 손을 잡고 그날 참석해야 하는 운동 종목들을 살펴보며, 백군인지 청군인지 살펴보고 또 등굣길 솜사탕을 사달라 칭얼대고 있었겠지. 계주나 줄다리기, 박 터트리기 등을 열심히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선명하진 않지만 분명하게 그날의 온도와 계절감은 기억에 남는다.

나의 초등학교는 이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당시 윤병규 교장선생님은 특별한 행사 하나를 기획해오셨다. 바로 ‘타임캡슐’

2002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2022년에 나의 모습은 어떨지 전교생 모두 작성하고 묻어두자는 기획. 전교생은 모두 20년 뒤 자기의 미래를 글과 그림으로 적었고, ‘꿈항아리’에 묻어두었다. 2022년 5월 5일, 오후 2시에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단단한 돌로 항아리 입구를 막아두었다.

당시 6학년인 우리들은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를 거쳐 어느덧 30대가 됐다. 20년의 세월은 살아온 나이의 절반을 훌쩍 넘는 오랜 시간이었고, 그만큼 새로운 기억과 추억, 사람들이 쌓여갔다. 꿈항아리는 물론, 초등학생 때의 기억은 지워질 대로 지워졌다. 바쁜 일상과 현실 앞에 유년시절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꿈항아리를 묻고 만나기로 했던 날을 기억했던 이들이 몇 있었다. 당시 선생님으로 재직했던 분들부터 친구들까지. 그리고 우연히도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내게도 연락이 닿았다.


“이민희 학생이죠? 꿈항아리 여는 날이 2주 앞이라 연락드렸어요. 혹시 주변 친구들 연락이 닿나요?”


맞다! 저걸 묻었었구나. 전화를 받고 난 뒤, SNS를 이용해 연락을 돌렸다. 그렇게 연락은 소문을 타고 계속 이어졌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일정을 공유받았지만 실제 참석할지는 의문이었다. 이미 수원에 살고 있지 않는 사람이 많았고, 저 작은 기억 하나로 번거로운 발걸음을 하기 쉽지 않았으니까.


다만, 당시 교장선생님과 통화하며 도울 일이 있을지 또 필요한 부분이 있을지 조율은 했다. 팔순이 넘은 교장선생님이 행사를 이끌기 어려우시기 때문에, 적어도 학생 한 명은 주도적으로 참석해야 될 것 같은 책임감에 연락드리고 일정을 공유받았다.


그리고 2022년 5월 5일. 학교엔 너무나도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다. 약 100여 명 정도는 왔던 것 같다. 20년 전 모습을 보기 위해 참 많은 학생들이 기억을 하고 찾아왔다. 놀랍게도.

학교는 여전히 우릴 반겨주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났다. 당시 6학년인 친구들은 하나둘씩 구령대로 모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얼굴이 기억나는 친구, 전혀 달라진 모습이지만 목소리가 똑같은 친구, 당시 좋아했던 친구까지 20년 만에 만났다


“와 너 OOO 맞아? 왜 이렇게 키가 컸어!”

“넌 정말 그때랑 그대로네! 동생은 잘 지내?”

“아직 여기 살아? 나는 여의도로 이사 갔어.”

“결혼은 했어? 무슨 일 하면서 지내?”


태어나 이토록 반갑게 여러 명과 인사한 적이 얼마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추억 속 아이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아무 조건과 배경 없이 사람을 대했던 그 시절의 추억 때문일까. 무조건적인 반가움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안부를 한참 나눈 뒤, 20년 전 묻어둔 꿈항아리를 열었고, 비닐로 포장된 종이들은 문제없이 그대로 보관이 잘 돼 있었다. (사실 열기 전 지렁이가 가득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리고 그 안의 13살 나와 마주하게 됐다.

항아리 파내려고 삽질하다 당일 체력 다썼다…
20년 뒤인데 15년 뒤 모습을 썼네 :(

내 꿈은 축구선수와 변호사였더라. (변호사는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압박 같은데) 키는 132cm였고, 참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뒀구나. 13살의 나는 생각보다 꿈에 대해 진지하고 열심히 써두었다. 물론 지금 그 꿈과는 다른 일을 하지만, 여전히 축구를 좋아하고 자주 하기 때문에 절반은 맞은 걸로~


다른 친구들도 자기가 쓴 종이를 보고 웃음 짓고 있었다. 그때의 꿈과 지금 모습이 일치한 사람이 있었을까? 모두 설레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모두가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단체사진을 찍고 학년 별로 친구들끼리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당시 초등학생인 친구들 모두 어엿한 성인이 돼 있었다.

뒤풀이 장소에서도 20년 전 추억들을 한 움큼씩 나눴도, 이후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바쁜 일상 속, 잊혀둔 기억과 사람들을 떠올려냈던 특별한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이 글을 통해 당시 교장선생님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싶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본인이 재직하는 학교의 학생들에게 특별한 경험 하나 심어주고 싶다는 의지로 행사를 진행해주신 교장선생님. 몸이 많이 편찮으심에도 행사를 위해 학교도 직접 방문하시고, 여러 학생들과 기념사진도 찍으셨다. 후에 다른 선생님께 이야길 들으니, 행사일 전에 본인이 많이 아파 이 세상에 없으면 어떡하나 많이 걱정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백여 명이 넘는 학생들은 바쁜 일상 속 다시금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여유를 찾고 나아가 잊힌 인연들과 연락하게 됐다. 이 작은 공간에서나마 감사함을 표한다.


https://youtu.be/mumK0JxEnJs

​잘 지내셨나요
그랬길 바라요
당신의 새벽이 고요하길
기도했어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둔
당신이 두고 간 화분에는
자라지 않는 마음 하나


그리고, 다시 또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정해진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또 술도 마시고 운동도 하는 그런 일상. 하지만 하나 달라진 건,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카톡 친구로 들어와 있고, 어엿하게 동창회 카톡방이 생겨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40명에 가까운 친구들이 한 공간에 모였고, 오는 5월 말에는 다시 한번 얼굴 보며 모이기로 했다. 잊고 있던 추억은 하나의 경험에 의해 구체적인 만남으로 이어졌다.


모두 20년 동안 사건사고 없이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었고, 나 역시 잘 자라왔음에 감사했다. 여전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린 시절은 더욱 멀어지겠지만 이 날의 행사는 초등학생 시절 기억을 꽤나 선명하게, 오랫동안 잡아줄 것 같다. 현실이 힘겨울 땐, 이 날의 기억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20년 간 잘 지낸 모두에게.

앞으로도 가끔씩 오래 보자.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다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구독과 공감, 댓글은 더 좋은 매거진을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매주 수요일 '수플레'를 기다려주세요!

(비슷한 감성의 음악 공유도 환영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 자리에 티가 났음 좋겠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