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6_기아대책 국제NGO선교포럼
NGO란 법이나 제도가 요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정부나 이익단체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정부가 수행해야할 공익활동을 대신 수행하는 조직을 뜻한다. 정치에서 NGO활동이 활발한 사회를 시민사회라 부르고,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사회는 대부분 시민사회가 되었다.
NGO 선교란 교회나 선교단체가 파송한 공식 선교사 대신 다양한 능력과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피선교국에서 순수하게 그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뜻한다. NGO 선교단체는 교회의 공식적인 조직이 아니고, 기독교 포교를 표방하지 않으면서 피선교국 사회에서 공익활동을 수행한다.
그래서 만약 포교를 표방하든지 사회적 약자가 아닌 특수 소수만을 위해서 활동하면 그 단체는 NGO자격을 상실한다. 공산주의 국가나 이슬람 지역조차도 NGO 선교단체를 허용하는 것은 공식 선교사가 아닌 사람들이 포교활동을 표방하지 아니하고 공익을 위해서 활동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NGO사역에 대해서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이라는 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NGO 선교라고 부를 수 있는가?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소위 말하는 닫힌 국가(공산주의, 이슬람, 불교와 힌두교 국가)에서 선교의 방식으로 NGO 선교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선교적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도 전통적인 선교의 방식이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과거 제 3세계에 선교사를 보낸 나라들 중에 대부분분이 유럽의 식민지를 만든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선교사에 대해서도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직접적인 복음전파보다는 구호, 교육, 기술, 의료 등 그들에게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NGO활동이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더 쉽게 만들 수 있고 간접적으로 선교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나아가서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은 그 자체로만 국한되지 않고 몸과 마음, 이웃과 관계, 사회생활을 포함한 한 인격 전체에 확장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다.
이원론적으로 예수 믿고 천국가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NGO 활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선교적 의미를 충분히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교하는 교회의 차원에서도 선교가 영혼구원이라는 이원론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공동체로 나아가는 확장적인 개념에서 NGO선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상당수 기독교 NGO들은 좁은 의미의 복음전파를 소홀히 하거나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NGO 활동이 선교를 위한 준비단계이거나 간접적인 선교란 인상을 주지 않고 오직 인도적 사랑을 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정직하고 순수하게 사랑을 베푸는 것 그 자체가 그리도를 전하는 선교라고 보는 것이다. 그결과 개종이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입장인 것 같다.
그런 정책이 전혀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순수한 사랑의 실천이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고, 숨은 동기를 가지고 돕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더 좋은 열매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NGO 선교단체 가운데 독특하게 국제기아대책은 가능하면 '떡과 복음'을 같이 전달려고 노력하고 있다. 진정한 구원은 육체적인 기본수요의 충족을 포함하며, 복음 없이는 제대로 된 구후가 이뤄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떡은 어느곳에도 전할 수 있지만 복음은 특정 지역에서는 전할 수 없으므로 그런 지역에서는 다른 NGO 선교 단체들과 동일하게 활동할 수 밖에 없다. 기회만 주어지면 구와 더불어 복음도 같이 전하려는 것이 기대봉사단의 정책이다. 비록 쉽지 않으나, 이것이 NGO선교사역이 취할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가 한다.
바람직한 NGO 선교활동 가운데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도 전통적인 선교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교육선교라고 할 수 있다. 육체적인 수요보다는 정신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활동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는 선교명령을 가장 문자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공생적 사역이라고 한다면 아래의 메트릭스를 통해서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총체적인 변화와 그것을 위한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호-회복-개발-지속가능'이라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공생적 삶을 위해서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영역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아래와 같이 공생애적 사역의 매트릭스에서는 이러한 변수들을 조합하여 우리가 사역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구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삶의 기본권'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는 4가지 영역 중에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후원과 도움에 집중을 하게 되며 1년정도의 기간으로 사업을 진행한다.
회복의 사역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회복의 사역을 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의 변화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육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생각과 정신의 변화가 회복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
기본적인 육체적 구제 사역과 함께 2년부터는 정신적인 회복을 위해서 사역을 하게 된다.
구호와 회복 이후에는 비로소 개발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개발사역부터는 사회적인 영역까지 확장된 공생적 사역을 하게 된다.
개발 사역을 위해서는 작은 사역부터 시작해서 약 5년 정도의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발 이후에 우리는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약 4년 정도의 사역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영적인 부분까지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공생적 사역의 모든 메트릭스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공동체의 변화에 따라서 조금씩 확장되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는 순간,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증언하였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예수님 당시 헤롯이 짓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위한 이방인의 뜰, 이스라엘 여인들을 위한 여인들의 뜰, 이스라엘 남성들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성전의 뜰, 성직자(제사장과 레위인)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 대제사장만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로 나뉘어 인종과 성별, 직업과 계층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구역과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그리고 그 구역과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 휘장이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찢어졌다. 그리하여 인종과 민족, 성별과 계층을 구분하고 통제했던 경계선이 무너지고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그 길은 우리를위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였다' 그렇게 해서 '찢겨진 휘장'은 서로 간에 구별하고 격리하며, 차별하고 통제하였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은 사도행전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시면서 지방과 지역, 민족과 국가를 서로 구분하고 단절시켰던 경계선을 무너뜨릴 복음의 능력을 예언한 것이다.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 때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막혔던 장벽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벽을 넘어가야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바로 사마리아였던 것이다.
여리고 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어가던 사람이 선한 사라마아인을 만나 그의 사랑 실천으로 살아난 후,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골짜기 강도들을 퇴치함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었다_이덕주
다소 글에서 NGO 선교에 대한 내용이 깊게 다루어지지 않은 느낌이 있다. 그러나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모델링에 의해서 변화를 경험한 현지인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선교신학'을 가지고 상황과 역사, 민족과 변화 앞에서 설 것인가이다.
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스크랜턴이 보여준 대리경험과 전덕기 목사가 스스로 활동하면서 경험했던 성취가 합쳐져서 '일제 강점기 하의 민족상황'을 인식한 주체가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