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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8. 2020

마르크스주의는 항상 옳은가?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0. 들어가기


홍기빈 선생님의 논의는 간단하다. 총체적 계획을 세우고 실적인 변화를 이루어가자는 것. 논쟁과 이론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베른슈타인류의 수정주의자인가? 물론 베른슈타인을 언급할 때 긍정적인 면으로서 '문제제기'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대안없음을 비판한다. 정치경제학적인 분석틀의 대안으로 '살림살이 경제학'을 '이윤추구경제학'과 대비시키고, 문제해결의 이념으로 현실에서 하나씩 이루어가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외친다. 실제적인 변화를 이루어낸 비그포르스와 스웨덴 정치 경제, 복지제도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어떤 변화를 준비해야 할지를 역사적으로 밝혀준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마르크스의 이상과 문제점은 동의하나, 시대는 바뀌었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그림과 도구가 필요하다. 온고이지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제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공부하고 그 중에 살릴 것들은 살려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괴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 하겠지? 그래서 혁신이 필요하고 때론 혁명이 필요하다. 오늘은 마르크스주의가 붕괴해가는 1920년대의 모습들을 살펴볼 것이다.


1. 마르크스주의의 성립

3. 마르크스주의의 해체





4. 1920년대의 새로운 흐름들


(1) '대안적 과학의 필요성'


과학적 사회주의'의 위기

1920년대가 되면서 민주주의가 도래함과 동시에 포드주의에 입각한 대공장 체제가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 전체를 개조하려는 산업근대화 운동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고 19세기 말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모습, 정치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는 세계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전후복구, 전쟁배상금 문제가 대두되었고,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의 변화가 예상되었다. 국내산업구조의 극격한 변화와 금융 자보눚의의 발전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등은 살인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러는 와중에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상황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지적원천의 힘을 소진했고 결과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과학적 사회주의 위기의 3가지의 요인


_1. 사회주의 운동의 철학적 기초가 객관적 필연인가? 인간의 도덕적 결단과 자유의지인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사람 내면의 마음 변화와 객관적 상황을 도싱에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 인식의 틀이 있어야 했지만 당강령이나 단촐한 이론서로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_2. 현실적이고 일관성있는 총체적 계획의 부재로 인해 노동계급의 이익 정도로로 축소되었다.

무능력은 정통마르크스주의 진영만이 아니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서도 나타났다.

선언만으로는 제도개혁을 이루어낼 수 없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맞는 실제적인 대안을 내 놓아야 한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는 끊임없는 개혁운동 그 자체일 뿐,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총체적 계획 세우기를 포기했다.


_3. 20세기 변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이 없었다.

노동가치론(모든 것의 가치는 오로지 노동만이 생산한다)와 위기이론(자본주의는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외에 다른 분석틀이 없었다.

분석도 안되 있었지만 현실적인 대안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논쟁으로 끝났다.


(2) 1920년대와 새로운 노선들


_1.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Austro-Marxismus

오토 바우어Otto Bauer가 이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을 거부했다.

독일어권에서 유행하던 신칸트학파의 철학과 에른스트마흐Ernst Mach의 상대주의에 영향을, 반형이상학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철저한 사회과학 연구 프로그램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 문제인 민족 갈등 문제부터 법, 경제학, 문화, 사회 심리학 등등을 포함한 모든 사회 문제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 조사해 그 결과로써 내용을 채워야 할 사회조사 연구 계획으로 보았다.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점진적개량과 급진적 혁명사이를 왔다 갔다하면서 '저속도 혁명'slow revolution이라는 주제로 싸웠고 이에 대해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두가지 모두를 비판했다.

1920년대는 사회주의 혁명과 자본주의사회가 병존할 수 밖에 없음으로 비판과 거부보다는 새로운 실험과 새로운 제도, 형식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붉은 빈'Red Vien이라고 불리는 사회민주주의적 제도 장치들을 잘 결합하여 집권당을 지키며 문화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였다.


_2. 안토니오 그람시Antoni Gramasci

젊은 시절에 행동주의자 무솔리니를 잠깐 지지하기도 했고 토리노의 자동차 공장 지대를 점거하고 노동자의 평의회 운동을 이끄는 등 강한 행동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던 그는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다.

옥중에서 그는 구체적 상황에서 다수 대중의 자발적 운동을 속박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총파업의 신화'를 내걸고 노동자들에게 무모한 직접행동을 강요하는 소렐류의 극단적 주의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기 위해 '현대의 군주'로서의 정당의 임무를 확인한다.

현대의 군주가 해야할 일은 '독자적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확립하는 것이다. 운동의 동력과 힘으로서 대중들의 열망과 참여를 최대한 끌어 안으면서도 그것이 크로체가 경멸적으로 말한 것과 같이 정념에 휘둘리는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정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진 정세와 사회 세력의 역학 관계를 역사적 전통과 문화까지 아우르며 총체적을로 정밀ㄹ하게 분석해, 그 나라의 상황에 가장 잘 맞는 '역사적 블록'을 구성할 수 있는 구체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러한 과학적 작업을 통해 그람시가 내 놓은 정치학은 실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무능력을 타파할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이고도 유명한 것이었다.

노동계급은 우선 자신들의 협소한 계금적 이익을 내세워 배타적 행동을 하는 대신, 사회 전체의 국내적이고 국제적인 상황을 두르 살펴서 민중 전체가 마음으로 열망하는 '국민적, 민중적 요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전투적으로 옹호해야 한며,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의 이익조차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ㄹ 통해, 이러한 요구에 호응과 지지를 보내는 모든세력들을 광범위하게 규합해 대안적인 역사적 블록을 형상함으로써 파시스트들이 장악한 지배 블록을 몰아내는 공격적인 정치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https://brunch.co.kr/@minnation/707


_3. 벨기에 사회민주주의자 앙리 드 망Hernri de Man


마르크스보다 더 명민한 마르크스주의이론가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놀라운 지적능력을 가진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미래는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이론 체계를 구성할 때에만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정주의자들과 같이 유물론이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20세기 자본주의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주장했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 계급의 해방을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로 삼은 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오류라고 주장했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사회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는 그는 유명한 저서 '사회주의의 심리학'에서 노동계급의 의식에 자리잡은 '부르주아화embourgeoisement'의 심리를 갈파한다. 노동자들이 마음속으로 열망하는 것은 물질적, 문화적 생활 수준의 개선을 통해 부르주아들과 똑같은 시민의 삶을ㄹ 얻고자 하는 것 뿐이며, 그들의 의식 속에 선천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유전자가 박혀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믿음은 터무니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역사적 기원에서 있어서 사실상 어떤 계급의 이익이나 의식과도 무관하게 생겨났으며, 굳이 기원을 찾는다면 중산 계급 출신 지식인들의 의식과 열망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중산계급 출신 지식인들의 의식과 열망을 노동 계급에 씌워놓은 것 뿐이다.

그래서 드 망은 사회주의 운동은 오로지 모든 시민들이 서로를 아끼고 서로에게 더 좋은 삶을 가려다주기 위해 연대하려는 공동체의식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라는 협소한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실현할 전국적 단위가 그 운동의 단위를 이루어야 했으며, 그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경제 과학에 기초해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가 설계되어야 했다.

1930년대 대공황이 도래했을 때 그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했다. 공공부문과 사적부문이 공존하는 혼합경제로의 개혁안을 내 놓으면서 혁신적인 대안을 담은 '노동의 계획'은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1930년대에 나온 새로운 사회주의적 기획 중 가장 일관성이 뛰어난' 것으로서, 1933년 벨기에 사민당에 채택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 프랑스 사회당과 레옹불룸의 인민전선 내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노선들의 결말


오스트리아 사민당은 1931년 선거에서 41퍼센트의 놀라운 지지율을 얻었지만, 빈을 포위하고 있는 농촌지역 중소도시 세력들과 연대하는 데 실패해 그 지역들에 뿌리를 둔 돌푸스 파시즘 세력에 밀리게 되었고, 1934년에는 빈에서 마저 강제로 축출되었다.

1926년 그람시는 자신이 구상한 '역사적 블록'형성 전략을 담은 '리옹테제'를 발표했다. 그람시가 투옥당한 후 그의 정치적 동지인 톨리아티는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당시 스탈린이 장악하고 있던 코민테른은 지금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한 시점이라고 강변하면서 사회주의 봉기 이외의 그 어떤 계급 동맹 전략도 모두 반동적이라고 윽박질렀고, 결국 1929년에 톨리아티도 코민테른 앞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앙리드망은 벨기에 노동당의 지도자이자 정부의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해 자신의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혼합형 경제 체제를 건걸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금융 전체를 적극적으로 조직해 들어가는 능동적인 당의 행동이 필ㄹ요함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은 그 고질적인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대기주의에 갇혀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하지 못했고, 경제개혁도 지지부진해지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드 망은 엉뚱하게도 1930년대 말에 차라리 독일 나치즘에 협력해 그 '국가 사회주의'의 이념적 힘을 빌려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나치 협력자로 돌변했다.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1940년에 스위스로 망명해 버렸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조죽 벨기에에서 열린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민네이션 생각

홍기빈선생님의 논리는 어떻게 보면 '수정주의'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다른 강의에서 베른슈타인을 위대하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비그포르스에 대한 평가도 마르크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노선으로 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대기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의 문제는 무엇일까? 시간이 지나서 자본이 적응하기 시작하고, 적응한 자본이 새로운 문제들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면서 자본주의는 더욱 강해지고 있는데, 대기주의에 빠져서 공상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던 이들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직 잠점적 유토피아의 이념에서 현실에서 이룰 수 있는 유토피아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작게나마,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전제에서 스웨덴과 비그포르스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떻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것인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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