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1_김만권교수님의 강의 내용
인간답다는 말은 인간을 이루는 야수성 중 야수성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향해 산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생존의 게임에서 벗어나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런 '인간다움'의 가장 절정의 표현이 바로 정치이다.
결국 인간다운 인간이되는 조건은 정치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인간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이 바로 자유와 평등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래 모든 정당한정치 이론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전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어떻게 우리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근대세계의 자유의 문제는 자유가 인간을 비정치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에픽테투스 ;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자유롭다.
아리스토텔레스 ; 어떤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는 것 - 정치학 -
한나아렌트는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에세이에서 이런 것이 자유는 아니라고 말한다.
자유가 하나의 문제로서가 아니라일상적 삶의 사실로서 알려져 있는 장은 정치영역이었다.
우리가 자유의 문제를 언급할 때, 정치의 문제 그리고 인간이 행위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항상 우리의 생각 속에 있다.
자아가 세계를 등지고 숨어 있는 내적공간을 양심과 사유의 공간인마음이나 정신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유 또는 그 반대를 우리 자신과의 교류를 intercourse가 아니라 타자와의 교류속에서 깨닫게 된다.
자유는 분명 해방을전제로 한다.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서 삶의 필요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자유의 지위는 해방의 행위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는 단순한 해방 이외에 동일한 지위에 있는 함께 하는 타자들의 무리를 필요로했고, 또한 그들을 만날 고통의 공적 영역을 필요로 했다.
스위스 태생의 벵자맹 콩스타(1767-1830)의 논리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인 인간이 되었지만, 현대인들은 법의 지배 아래서 시민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의적인 정치권력을 제한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정치로부터 잠재적 자유로서 정치적 자유를 방임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단순히 최근의 경험이 아니라 정치이론사에서 큰 역할을 담당.
이런 관점에서 정치적 자유를 정의할 떄, 정치 최고의 목적, '정부의 목적'은 생명, 신체, 재산의 안전보장이었다.
이런안전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이 때 자유는 정치영역 바깥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진수를 이르는 말이 된다.
최고 권력자의 '발톱과 부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온전히 지탱하기 위해, 최고 권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규정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권력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을 바로 자유liberty라고 불렀다. -존스튜어트밀의 '자유론'에서
헌법주의 constitionism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지키지 않는 그러나 법의 지배를 외치는정체를 헌법주의의 배경에 있다고 말한다.
헌정주의 constitutionalism 헌법의 정신이 모든 법의 정신과 체계보다 상위에 있어서 헌법의 정신이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되는 체제를 헌법정치체제라고 말한다.
슈클라는 이성보다는 보편적 감성에 호소함으로서 더욱 인간을 잘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유주의가 반드시 맞서고 피해야 할 최우선의 안석으로 잔인성cruelty을 제시한다.
우선 자유주의자들에게 잔혹함은 절대로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잔혹함이 불러 일으키는 두려움은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선 자유주의자들에게 잔혹함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잔혹함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은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권리란, 인습의 억압, 혁명통치, 전쟁, 군부 쿠테타 등 고통의 절규조차 침묵케 만드는 폭력의 공포에 대한 표현이며,헌정질서의 책무란, 권력의 남용과 일탈로부터 가장 연약 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the most feeble and helpless among us을 보호하는 것이다.
우열한 자와 열등한 자들이 확고하게 구분되고, 우월한 자들이 열등한자들의 처지로 떨어질염려가 없는 곳에서 가혹한 폭력은 손쉽게 발생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
의견과 표현의 자유후는 사상의 자유를 자유롭게 전제로 함.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한느 일은 옳지 못하다.
마치 어떠한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강요한느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다.
지식을 사유화시키는 방식으로 글과 말을 시작하게 되면, 그것은 발설하는 순간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게 됨으로써 제대로된 의견이 피력되기 어렵다.
합리성 안에서 상대를 설득하는 것과 다른생각을가진 사람들을 교정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 안에 있는 하이라키와 지배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강제와 강요는 그 주장의 마지막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달려 있다.
수렴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서로를 향해 귀기울이는 변곡점이 필요하고 그 변곡점은 결국 발산점의 이동을이야기 한다.
그리스어에는 행위하다'를 의미하는 아르케인archein과 프라테인prattein이라는 두개의 동사가 있다.
Archein 즉, 시작하다to begin, 이끌다 to lead, 지배하다 to rule이란느 뜻이다.
Parattein은 무엇을 완수하다 to carry out semething through의 의미이다.
아르케인의 속 뜻은 동류의 사람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며 선도자로서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프라테인은 아르콘, 즉 지배자, 개시자, 선구자가 된 사람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진정한 의미에서 행위하고 자신이 일단 시작한 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 자유의 개념은 자유가 혼자서 달성할 수 있는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공공영역에서 뜻을 함꼐하며 같이 행동하는 자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료들의 도움이 없다면 스스로 자율성을 가진 어떤사람이 다른 이들을 재바함으로써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결국은 민주주의의 퇴보를 가지고 온다.
공공의 장에서 인간 개인들이 권력의 잔혹함이란 위협 없이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정치적조건들을 동료들과 함께 안전하게 확복하는 행위를 자유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분단의 구조가 가지고 온 우리 안에 보수와 진보논쟁은 일상 속에서 매우 첨예하다.
어떻게 보면 미디어와 여론이 우리를 그렇게 편가르기 식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잃어버린토론의 힘인 평등과 다원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구조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보수와 진보의 논쟁 이면에 혹은 그 깊이에 있는 진정한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소가 필요하다.
정치'라는 것, 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의 개념은 항상 동서양이 역사주의 전통으로 부터 가지고 온다. 그 역사주의 전통의 시작점을어디로잡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정의하는정의'concept이 달라진다.
정치는 무엇인가?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아렌트나 모겐소나 슈나이더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로깊이를상실하는 순간이 아닌가?
정치의 공간은 사실 multi-transforamation이 일어나는 곳이다. 각각의 변환은 스스로의 논리에 따라서 시간의 개념이 달라진다.
칸트의 주장을 빌려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제 3자의 선험성을 생각하고 내가 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말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돌이켜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제 자유를 정의할 때가 왔다. 자유란 보이지 않는 이웃을 상정하고 그들에게 해가 없는한에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가는 것을말한다.
자신의 중심에서 삶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경제적 필요에 정치적 자유가 우선한다.
진보의 축을 이루는 경제결정론자들이나 경제우선주의자들이 본다면 이런 주장은 순전한 헛소리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축은 가치, 견해, 입장의 다양성에 있을 뿐만 아니다.
경제적 필요가 정치적 자유를 압도한다면 그 자체로 민주적 정치생활에서 그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문제를 두고 기본적으로 같은 공약이 제시되었을 때, 성숙한 공중the well informaed publc이 아니라면 그 내부에 있는 본질적 차이를 파악해 내기는 쉽지 않다.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민주적 가치와 접할 기회가 없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들에겐 그 누구라도 자신의 입장만 개선해 준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들에게 좀 더 나은 민주주의는 좀더 좋은 텔레비전을 사는 일과 거의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창조에 있어서 어떤 레벨을 선택할 것인가가 개념의 포용성과 깊이를 만들어 낸다.
다시 근본적인 질문부터 들어가보자.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유하자.
우리들의 자유를 향한열망이 정치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자유 그 자체를 정치를 외면할 권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유주의적인지식인들은 정치적 무관심도내 자유라고 말함.
당연하고도마땅한 사실이나 무관심의 권린느 민주주의가 안정되게 자리 잡힌 곳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자신이 참여함으로써 변화가 시작될 때 시작된다. 물론 변화와 참여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제대로된 정치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마키아벨리와 맞짱 뜰 때가 되었고 밀과 밴담과도 등돌릴 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리는 원리가 '효용'이라면 그것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도 별로 재미가 없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우리를 바꿀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바꿀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생각의 속도와 변화의 속도가 괴리가 있다고 해서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세상을변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