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뒤집어 보자
이건 진심으로 비 전공자의 견해이다
요즘들어 토요일 아침 8시에 철학 강의와 스터디를 진행 한다. 협동조합에서 스터디를 5반이나 했는데 6번째로 이전에 공부했던 독일 철학자들을 다시 깊이있게 공부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한명씩 빨리 읽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후다닥 읽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한 명씩 아주 깊이 있는 차원까지 들어가서 진심으로 그 철학자가 고민 했던 게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은 그 노력의 산물로 작은 깨달음을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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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까지는 하이데거의 존재 와 시간을 통해서 기존의 존재론을 뒤집는 연습을 해 보았다. 서양철학이 고대로 부터 가져온 기존의 존재론을 뒤집었던 하이데거. 사실 그의 철학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존재는 존재자가 현상 속으로 나올 수 있는 이유이자 원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를 신은 아니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역사도 아니라고 얘기했다. 아주 애매하게 몇가지를 남겼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자의 관점에서
다른 존재 자들을 분류 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는 존재 자가 아니라 존재 자가 세상에 출몰 할 수 있는 원인으로써의 존재를 규명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오류에 빠진다. 그것은 다름아닌 존재보다 차원이 낮은 존재자가 어떻게 차원이 더 높은 존재를 규명 할 수 있는가이다.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자 중에서 자신이 존재 자라는 걸 의식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현존재인 인간이다. 그러나 현존재인 인간 역시도 존재자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현상 속에 나올 수 있는 원인으로써의 ‘존재’ 그 자체를 규명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근본기분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아니, 느낄 수 있다. 그러한 근본 기분이란 불안이나 경의와 같은 것이다.
요약하자면 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자를 나오게 만드는 원인으로써의 존재를 알 수는 없고 그저 느끼는 것이다. 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한, 존재인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다양한 존재의 측면을 근본 기분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 어려운 존재 시간을 아주 짤막한 언어로 정리 해 보면 여기까지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이해가 잘 안 된다. 존재는 또 누가 만들었을까? 만든게 아니라면, 만들지 않았다면 그러면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가 불투명함으로 존재자들 역시 불투명한 게 아닌가? 라는 순한 논법에 빠진다. 그래서 지난주에 강의란 하이데거의 철학을 고민하면서 머리가 너무 아팠고 결국 하이데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발터 벤야민으로 넘어 왔다.
아주 지극히 비 전공자인 사람이 보기에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은
지금까지 오독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의 진리만 존재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본론을 말하기 전에 엄청나게 베베 꼬고 있다.) 지금 이제 본론으로 들어 보자. 사실 발터 벤야민이 얘기한 아우라의 개념은 일회성, 원 본성 그리고 거리감을 통해서 생겨난다. 우리가 느끼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의 개념은 이렇게 단 한 번에 존재하는 진리의 순간이기도 하며 그 진리가 먼 거리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진본성을 가진 아우라는 소멸하거나 붕괴하기도 한다. 바로 기술이 발달 하면서 원본이 복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벤야민을 얘기하는 모든 학자들은 이러한 아우라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복제가 아니라 진품을 보거나 아니면 기술복제가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새로운 해석을 덧 붙이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앤디워홀의 작품을 찬양한다. 왜냐하면 워홀의 작품은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 속에서 아우라를 부활 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일단 이정도로 이해에서 예술 작품을 보거나 아우라 가득한 어떤 사물을 본다면 벤야민의 말이 맞다고 생각이 든다.
유대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의 관점에서
아우라 개념은 다르다
그런데 이번에 벤야민의 관련된 공부를 하다가 벤야민의 친구이자 벤야민에게 유대 신비주의를 알려 준 숄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숄렘이 전해 준 유대 신비주의, 즉 카발라의 전통을 이해 하지 않고서는 벤야민의 아우라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 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철학책들을 찾아 보면서 혹시나 벤야민의 아우라의 개념 속에 카발라 전통의 흔적을 찾았는지를 살펴 보았지만 지금까지는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은 이렇게 편안한 언어로 내가 발견했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남겨 놓는다.
유대 신비주의에서 신은 ’에인소프‘ 라고 하는 무한지이다. 그래서 신은 자기 스스로도 완전 하며 다른 도움이 필요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신은 이 세상을 창조 하기 위해서 자신으로부터 충만한 공간에서 뒤로 밀려나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공백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공백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우주와 지구를 만들었다. 그레서 신은 시간 속으로 숨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존에는 등장 하지 않는다. 아니 현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씩 어떤 사건이나 시간의 틈을 통해 신의 현현이 현상 속에서 드러난다. 신은 다시 사라지지만 신이 머물렀던 사물이나, 정신이나, 사람이나, 자연에는 그 아우라가 남게 된다. 그래서 아우라는 사실 신의 흔적이다. 그리고 신은 무한자 이기 때문에 그 속성인 아우라 역시 무안하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지 신의 현현을 재현함으로써 아우라를 현상 속에 등장시킬 수 있다
유대신비주의 전통 특징
1. 접근 불가능한 신성_에인 소프와 아우라
카발라에서 에인 소프(무한한 하나님)는 인간의 인식과 접촉이 불가능하며, 세피로트(속성의 구조)를 통해 점진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벤야민의 아우라도, 인간의 인식에 포착되면서도 완전히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아우라는 세속화된 ‘현대적 에인 소프’라고 볼 수도 있다.
2. 언어와 계시_조하르와 아우라
’조하르‘에서는 히브리어 문자 하나하나에도 신의 빛이 깃들어 있으며, 해석을 통해 신의 뜻이 드러난다고 본다.
벤야민도 예술작품, 사물, 언어, 기호 안에 ‘순간적 섬광’, ‘감춰진 진리의 진동’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아우라는 그런 내적 진리의 계시가 일어나는 현상학적 장이다.
3. 기억과 섬광_메시아적 시간과 아우라
카발라에서 메시아는 기억되지 않은 과거를 회복하고, 깨진 빛을 다시 결합하는 존재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통해 예술이 현재에 과거의 ‘섬광’을 불러오고, 지금-시간(Jetztzeit) 속에서 진리가 드러난다고 본다.
즉, 아우라는 단지 물리적 특성이 아니라, 시간적 구원 사건의 장소이기도 하다.
아주 간략하게 유대 신비주의 와 아우라를 연결하면 위와 같이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앞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더 고찰을 해 봐야겠지만 내가 찾아낸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있다면 이제 아우라의 개념이 완전히 머릿속에 들어온다. 기술 복제 시대 아우라가 사라지는 건 다시 얘기하면 신의 현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 복제 시대에 아우라를 부활 시키는 방법은 신의 현현을 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연결 되는 생각은 해석학이다. 해석학자인 가다머가 이야기한 지평 융합은 신의 현현과 인간의 재현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얘기하면 인간이 같은 사물이나 작품을 볼 때 자신의 해석의 지평에서 신의 현현을 해석한 재현을 융합한다면 아우라는 복제품이든 진품이든 ‘지금 여기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무한자로서 어디에나 있으면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복제품이든 진품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아우라를 부활 시키는 건 대상으로써의 작품이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의 아우라의 해석을 담은 언어이다.
놀라웠다. 이번 주 이것을 발견하고 너무 즐거웠다.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한나 아렌트와, 숄렘 그리고 벤야민을 비교 하면서 각각 유대교를 신봉하고 시온니즘에 대한 관점을 가진 철학자로서 다시 정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가 있으면 심지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숄렘이나 벤야민은 아렌트에 해석에 대해서 가열찬 비판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유 하지 않음으로 아히히만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카발라의 전통의 의하면 다른 결론이기 때문이다. 신의 현현을 볼 수 없는 현존재인 인간이 의도적으로 신의 재현을 민족이나 조직으로 바꿔 버렸기 때문인데 이것이 단지 생각없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에게는 신을 게르만 민족이거나.히틀러의 사상으로 바꾸어 해석한 것이다.
이런 흐름들에서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아우라는 매우 신학적이고 신비롭다. 추후에 더 고민을 하겠지만 유대 신비주의 즉, 카발라 전통을 이해하면 같은 전통에 서 있는 칼 융이나 그 외에 오컬트적인 요소를 가져온 실존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 제기 했던 문제 즉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카발라 전통으로 보자면 하이데거는 나치와 같이 신의 존재를 민족이나 역사로, 혹은 시간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소위 벤야민이 보기에는 세속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볼 때는 그러한 전환 때문에 하이데거에게는 더 이상 존재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근본 기본과 같이 느낌 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기존에 이러한 신의 개념을 그림자처럼 볼 수는 있었지만 발터 벤야민처럼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독일 현대 철학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벤야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벤야민에 대한 찬가를 들을 때마다 뭔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니 이제는 이해를 넘어서 적용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까지 철학 비전공자가 생각한 발터 벤야민의 이우라 개념에 대한 유대 카발라 전통의 해석이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사건 하나를 보고 마치자.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쉽게 명을 받아서 내려 온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너무나 밝아서 사람들의 눈이 멀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세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 모세는 신의 현현 앞에 자신의 얼굴로 아우라를 담아 온 것이다. 이것을 엠마누엘 레 비너스는 사람의 얼굴은 신비라고 이야기 했다. 다시 얘기하면 신의 현현이 인간의 얼굴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을 보자마자 우리는복종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타자의 얼굴은 바로 신의 아우라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타자 철학을 완성 한다.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카빌라 전통에서 벤야민을 본 것처럼 레비나스의 철학도 다시 들쳐 봐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이렇게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안고 잠이 든다. 이제부터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인 비판학파의 철학들을 살펴볼 차례이다. 자 또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쁜 마음으로 공부해보자. 그러나 세계을 해석만 하려고 하지 말고 변화시키려는 심산으로 도전해보자. 이상으로 비전공자의 아우라 개념에 대한 이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