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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에 인간

하이데거철학의 기본개념_처음읽는 독일철학

by 낭만민네이션

10년전에 하와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가보는 하와이의 장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왔다. 특히 화이트샌드비치라고 하는 지역에서 '투명한 카약'을 빌려주는데 바다를 혼자 여행할 수 있는 아주 스릴있고 즐거운 레포츠였다. 기대되는 마음으로 함께 갔던 사람들과 1인용 투명한 카약을 빌려서 3km정도 떨어진 중간섬을 가기로 했다. 쏟아지는 모래밭의 빛살에 들뜬 마음으로 카약을 몰고 점점 망망대해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신나고 즐거운 마음이었지만, 점점 육지와 떨어질 수록 수심은 깊어지고 바닷속은 검은 색으로 변했다. 태평양의 대륙붕이 항상 그럿든 바로 깊은 심해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더욱이 옆에서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싣고 바다거북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숨통을 조여오는 불안감이 생각의 흐름들을 모조리 붙잡아 버렸고, 이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하나님 제가 너무 설쳤죠?


신앙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던 터에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신의 존재를 제외하는 생각까지 했던 것들을 모두 회개했다. 그리고 그 깊은 수심을 움직이고 이 세계와 온 우주를 운영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정말 대단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했던 것이다. 이것은 완전힌 '경이'로운 감각이었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조그마한 피조물이 내 뱉을 수 있는 한계가 가득한 언어였다. 전율이 일고 더 이상 나 자신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으로 고조되던 기분은 점점 경이와 환희로 바뀌었고 이내 가려던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근본기분'이라고 불렀다. 존재자가 거대한 '존재의 지평'에 도달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기분이다. 이 기분은 감정과도 다르고 분위기와도 다르다. 이 세상의 '설정'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간 느낌이기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 8시마다 연구자들과 함께 철학스터디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영국과 미국의 철학자들을 마쳤고, 프랑스철학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번년도부터는 독일현대철학을 시작하고 있다. 마르크스, 니체, 로자룩센부르크의 철학을 살펴보았고, 이제는 하이데거를 살펴볼 차례이다. 사실 하이데거의 철학이 가장 어렵긴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철학아카데미에서 배운 걸 살펴보고 책을 다시 읽어보고, '존재와 시간'을 다시 읽었다. 그래서 오늘 그나마 조금이라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중심으로, 근본기분(특히 불안과 경이의 비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레비나스, 한나 아렌트와의 비교하려고 한다. 그리고 서양철학에서 존재론의 변혁으로써 ‘존재(be)’에서 ‘되어감(becoming)’으로의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알아본다. 하는 김에 확실히 하기 위해서 존재와 시간을 잠깐 요약하고, 하이데거의 철학이 잘 담겨있는 짐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쑈’를 살펴보려고 한다. 긴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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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 물음의 복원_존재와 존재자의 구별, 존재의 드러남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점은 철학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여는 데 있다. 그는 고대부터 이어져온 서양 형이상학이 수많은 존재자들에 대해서 고민했지만 그 과정에서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존재자'중심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한다. 과거 그리스에서는 '퓌지스'라는 '자연'에 대해서 단순히 과학적으로 증명된 자연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 영혼과 사물, 인간과 신, 개념과 감정까지 모든 것들을 존재자로 보았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신의 영역까지 한꺼번에 봄으로써 존재론의 시초를 닦았다. 존재론이란 어떻게 보면 '있다'라는 것이고, '있다'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묻는 것이 존재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를 지나면서 과학의 영향으로 그 존재자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조건, 즉 ‘존재(Sein)’ 자체는 물어오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존재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는 어떤 실체적 ‘것’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들이 드러나고 이해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의미의 장, 드러남의 조건, 열림의 구조이다. 더 어려워지지만 한마디로 '존재'는 '존재자'들을 있게 만드는 조건이자 공간이자 상황이다. 게임으로치면 캐릭터 설정창일 수도 있고, 유저 자체일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그러나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어떤 개념이나 대상을 규정하려면 그 규정하는 대상이 자신보다 더 작거나 좁아서 파악이 되어야 하는데 '존재자'인 자신보다 '존재'는 더 큰 개념이기 때문에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후에도 살펴보겠지만 존재를 느끼는 '기분'에 집중하게 된다. 인간의 기분 중에서도 '존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 바로 '근본기분'이다.


하이데거에는 존재는 존재자에 앞서 있지만, 그것은 인과적 기원이나 창조주로서 앞선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이러한 '존재'를 존재를 창조한 '피조물'로 보지만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존재는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의미를 지니기 위해 드러나야 하는 방식이며, 이는 하이데거가 고대 그리스 개념에서 되살려낸 탈은폐(Aletheia)로 설명한다. 존재는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사건이다.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알랭바디우'의 '사건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진리는 언제나 있는 것처럼 존재는 언제나 있지만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사건(Ereignis)으로 파악하며, 존재자는 그 사건 속에서 비로소 ‘있음’으로 경험된다. 존재는 따라서 존재자에 선행하지만, 결코 존재자와 분리되지 않는 관계적 구조로 존재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존재자를 정의내릴 수 없기에 시간성 속에서 나는 '역사'라고 생각한다. 혹은 '민족'이나 '거대한 우주의 힘' 정도로 생각한다. 마치 스타워즈의 '포스'의 힘이 우리를 지켜주듯이. 이렇게 이해해보면 우주의 힘을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어디에나 있지만 매번 드러나지 않고 '진리'의 순간에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일종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고 어떤 만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마블영화가 많이 있고, 소설들도 이런 방식으로 '존재'를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나오는 '우주의 힘'과 같은 것이다. 계속 예를 들어서 설명하지만 제대로 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드러난 만큼만, 경험한 만큼만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되어저 가는 becoming'속에서 드러난다. '근본기분'이 들 때, 다시 말하면 '불안'과 '경이'와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바로 존재의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우주의 포스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2. 존재를 드러남의 사건_불안과 경이라는 근본기분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인식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 밑에 혹은 위에 있기 때문에 기존의 존재론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존재론적 정초(Stimmung)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근본기분(Grundstimmung)이다. 근본기분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근본기분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존재론적 분위기이며, 존재의 열림에 참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병철은 '심리정치'에서 이러한 기분에 다른 개념인 '흥분'과 '분위기', '감정'과 비교하고 있다. 행동에 대한 반응이 '흥분'이며, 특정한 사건에 대해서 내면에 생기는 상황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기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신체적 감각들이 축적되면서 쌓이는 것이 감정이고, 이러한 흥분과 기분, 감정을 모두 총체적으로 볼 때 주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일종의 센스메이킹, 혹은 감을 잡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근본기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자신의 내면에서 느끼는 기분들 중에서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와 연결된 기분을 말한다. 대표적인 근본기분이 바로 ‘불안(Angst)’이다. 불안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낯설어지고 무의미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갑짜기 인생이 허무해지고 미래가 보이지 않으며, 영적으로 그로기상태가 되는 때가 바로 불안이다. 헬조선이라고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기분이 '불안'이며 이러한 불안은 사실 그냥 넘길 개념이 아니다.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은 인생의 전체를 보면서 '존재'의 근본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의 개념을 근본기분과 연결시키면 우리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 한국적인 특징이기도 하면서도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은 존재에서 온다


사실 한강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하이데거 식으로 하면 특정한 사건 속에서 만나게 되는 '근본기분'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대부분 이러한 불안을 소설로 쓰기도 했고, 1990년대 일본의 애니메이션들이 그렇다. 더욱이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은 불안을 주제로 존재의 무상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인 불안을 넘어서는 것은 '존재자'의 한계 안에서는 안되고 '신'을 만나야 비로소 해결된다는 이야기도 여기에서 나온다. 물론 니체는 같은 맥락에서 존재자로써 존재로 넘어가기 위한 존재자들의 왕인 '위버멘쉬'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근본기분을 느끼는 우리는 기존의 일상적 의미망이 해체되는 가운데 존재자들이 아닌 존재 자체의 침묵과 허무를 경험하게 된다. 불안은 인간을 존재자들의 세계에서 끌어내어, 존재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전환의 계기다. 이 경험을 통해 인간은 진정성(Eigentlichkeit)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진정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실로 인간이 인간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세계의 기본적인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정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깐 진정성이 발휘되는 구조는 이렇게 사건을 통해서 점점 깊이 있는 진정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면서도 존재와 만나게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제주 4.3사건이나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를 만났을 때 분노와 함께 들게되는 기분인 '불안'은 어쩌면 존재란 무엇인가를 다 같이 묻게 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 후기 사유에서는
‘경이(Erstaunen)’가 새로운 근본기분으로 부상한다.


경이는 사물이나 세계가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의 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분은 존재의 드러남을 강제하거나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자들을 뛰어넘는 숭고한 방식의 자기를 존재자들에게 선사하는 방식에 존재자가 열린 채 응답하려는 태도로 나타난다. 불안이 존재의 어둠을 마주하게 했다면, 경이는 존재의 찬란한 빛을 감지하게 만든다. 그래서 '경이'를 통해서 존재자는 존재를 경험하고 존재자들이 투척되어 있는 현실에서, 현상에서 벗어나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길을 걷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이'와 같은 근본기분은 폴틸리히의 신학이나 칼바르트의 신학에서도 등장한다. 신을 만나면 우리는 '인식'의 세계에서 '앎'을 경험하지 않고 '근본기분'의 세계에서 '경이'를 경험하게 되고 경탄하면서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근본기분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시적요소가 된다.존재자들의 관계를 비틀에서 새로운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3. 현존재와 실존_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비교


하이데거의 개념들은 어렵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가 직접 개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후설은 현상학적인 장이 열리는 것이 지향성인 노에시스에서 투사되는 현상인 노에마에서 열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현상되는 모든 세계는 노에마이고 랜턴으로 치면 빛을 비추면 빛이 맺히는 상 전체가 노에마가 된다. 현상 전체를 인간의 의식이 파악하는 방식이 바로 노에마인 것이다. 이러한 노에마는 일종의 의식이 가진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임은 '시간'과 '공간'을 인간이 인식하는 만큼 생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말한다. 의식은 항상 지향성을 갖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지향하는 대상은 일종의 '장'안에서, 특정한 '프레임'안에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있으면 이제 현존재를 이해하기 편해진다.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은 인간을 존재자 중 하나로 취급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로 설정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처해진 '현상' 속에서 나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존재는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이자, 시간성과 죽음을 자각하며 자기 가능성을 구성해나가는 실존적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통해 존재가 드러난다고 보며, 이는 존재자 중심의 전통 철학을 넘어서는 사유의 핵심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을 수 있는 '현존재'를 통해서 '존재'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 세상이 이렇게 설정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존재인 현존재는 자신을 초월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은 이 세계 안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현상학적인 장인 '세계 내 존재'로서 존재의 드러나는 '근본기분'을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대자존재(pour-soi)라는 개념을 통해 실존주의를 전개하지만, 존재론의 방향성에서는 명확히 구별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완전한 자유의 존재로 보며, 스스로의 본질을 창조해야 하는 ‘무(néant)’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아가 대상화되는 대타존재(pour-autrui)를 분석하면서 주체의 분열과 긴장을 강조한다. 샤르트르는 하이데거의 개념과 비슷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인 즉자존재'를 상정하고, 이와 반대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대자존재'를 형성한다. 무엇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메타인지를 가진 존재가 바로 대자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인식을 꺼내서 바깥으로 투사할 수 있는 동일한 존재를 알아보는 것을 '대타존재'라고 보았다. 그래서 대타존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반응하게 되고, 그 시선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타인은 지옥이고, 모든 타인들과는 '악연'으로 묶여져 있다.



반면 하이데거는 존재의 드러남을 강조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상정하면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던져진 조건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상승할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으로 파악한다. 하이데거에게는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갖혀있지 않고 세계를 초월해서 열려진 시간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르트르는 자유를 절대화하며 주체의 창조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현존재 안에 갖힌 반면, 하이데거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의 제한성과 열림을 동시에 사유하기 때문에 초월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대가라고 할 수 있게 실존과 본질을 연결해서 존재자들에 갖히지 않고 존재자를 있게 만드는 존재의 큰 흐름으로 존재자 중에서도 인식할 수 있는 현존재들을 부르는 것이다.



4. 존재의 윤리적 전환_레비나스와 아렌트와의 비교


하이데거는 1년정도 밖에 안되지만 나치에 가입하면서 '나치의 전위 철학자'라는 오명을 받게 된다. 그 당시 현상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후설의 제자로써 명성을 날리며,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있던 하이데거는 치명적인 두 제자에게 비판의 표적이 된다. 서른 중반이 넘어서 15살이나 어린 제자와 불륜에 빠지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한나 아렌트이다. 워낙 유명했던 하이데거의 명성과 신비로운 철학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하이데거는 나치철학의 전위철학자가 되면서 당시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 한나아렌트 역시 유대인이었지만, 다른 한 제자가 바로 엠마누엘 레비나스이다. 한국에서는 '타자의 철학자'로서 알려진 레비나스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서 완전히 반대 입장을 가지게 된다. 물론 추후에는 하이데거로 부터 배운 현상학적 특징을 강조하지만 유대인으로써 자기 자신이 미워질 만큼 스승과의 관계는 애매하고 모호했다.


존재에서 타자로 전환


먼저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을 살펴보자.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존재 중심'의 철학을 '타자 중심'의 윤리로 전환시키려 했다. 그는 하이데거가 존재를 중심에 둔 나머지, 타자의 윤리적 호소와 무한성을 간과했다고 보았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윤리'란 타자의 얼굴과 마주할 때 발생하는 무한한 책임의 경험이며, 존재에 앞선 타자의 초월성이다. 그는 ‘존재의 탈주(ex-cendence)’를 강조하며, 존재의 전체화에 저항하는 타자의 절대성을 주장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은폐와 탈은폐에 관심을 두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나타남 자체가 윤리적 충격으로 인간을 각성시킨다는 입장에서 존재론을 넘어선다.


사실 철학의 기본적인 요소는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그리고 윤리론으로 연결된다. 하이데거가 존재론을 기반으로 존재자체가 되어가는 방향성을 가져갔다면 레비나스는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의 얼굴 안에서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려고 했다.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얼굴'은 신비의 핵심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얼굴은 신의 얼굴이다. 따라서 타자의 얼굴을 볼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타자를 윤리적으로 대하게 된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의무가 생기고 윤리가 생기는 것이다. 얼굴의 신비는 레비나스에게는 존재론적으로 '규정된 거대한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자가 바로 존재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다른 한편,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현상학적으로 계승하지만 현상세계 안에서 풀려고 했다. 보통 존재론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상승하는 과정에서 존재자와 층위를 다르게 가져갈 수 있지만 한나아렌트는 상상계와 같은 상층부로 가지 않으면서 물질이 지배하는 자연으로 치환하지 않고 오히려 현상세계 안에서 인간의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행위론을 논했다. 그래서 한나아렌트는 행위, 탄생, 다원성의 정치철학으로 정신세계의 존재론을 현상세계로 전환했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존재를 ‘노동,작업,행위’라는 구조 속에서 위치시켰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이다. 행위는 정신세계가 '사유, 의지, 판단'을 현상세게에 드러내는 방식이며, 존재자들의 공론장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요소이다.


행위는 말과 행위를 통해 타인과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존재로 재해석한다. 특히 ‘행위’는 하이데거의 존재 개시 개념과 닮아 있지만, 아렌트는 이를 공적 세계 속 다원성과 자유의 출현 방식으로 확장한다. 존재는 더 이상 단순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에서 함께 구축되어가는 정치적 사건이 된다. 은폐되어 있는 존재가 '근본기분'을 통해서 존재자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들 안에 이미 내재한 정신세계의 내밀함이 공적 공간에서 담론과 행위, 말과 실천을 통해서 지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나아렌트는 상층부로 올라가지도 않고 심층부로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현상세계 안에서 정치적인 공동체를 지향한다. 레비나스와 아렌트는 이런 방식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뒤집거나 비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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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존재에서 되어감으로_존재론의 전환과 탈형이상학


서양철학에서 존재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be'동사에 대한 관점으로 정리된다. 다시 말하면 be동사의 앞에 올 수 있는 명사는 모두 존재론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서양헤서는 심지어 '없음'이라는 'nothing'이라는 단어도 존재론에 들어간다. 없음 자체가 존재론의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be동사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일단 존재자들을 어느위치에 고정시키고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찍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고정된 실체나 위계적 질서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드러나고 사라지는 과정, 운동,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사에서 ‘존재(being)’ 중심에서 ‘되어감(becoming)’ 중심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고대 형이상학은 존재를 항구적 실체로 보았고, 데카르트나 칸트 역시 존재를 인식의 대상이나 조건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를 언제나 드러남과 은폐 사이에서 흔들리는, 시간적이고 사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전환은 이후 들뢰즈, 데리다, 푸코, 바디우 등 현대 철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들뢰즈는 존재를 ‘차이와 반복’ 속에서 기계적 생성과 흐름의 운동으로 해석하고, 데리다는 의미의 미끄러짐 속에서 영원히 고정되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추적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문을 연 선구자가 된다. 현대 존재론을 열어제낀 하이데거는 그러나 차원의 관점에서 존재를 객체화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저 차원에서 고차원으로 갈 수록 고차원에서는 '정의'내릴 수 있지만, 저차원에서는 고차원을 정의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자가 규정할 수 없다


물론 이런 표현 방식 자체가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해를 위해서 일단 이렇게 표현해보자. 하이데거는 존재를 자체로 드러나게 하고, 듣고, 응답하는 사유의 태도로 becoming의 철학적 존재론을 전환시킨다. 하이데거 이후에는 존재는 더 이상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사건’이 되고 이어서 존재는 항상 우리 앞에 열린 상태로 탈은폐 되어서 나타난다. 이후 하이데거의 철학은 실존주의에도 영향을 미치고 신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신학에서 신의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의 존재 역시 '되어감'의 존재라면 자연스럽게 '과정철학'과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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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존재와 시간


이제 마지막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의 핵심이 담긴 '존재와 시간'을 정리해보고 마무리 하자.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은 20세기 존재론의 전환점을 이룬 철학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 실존 철학이 아니라,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인간의 존재 방식 안에서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이 간과한 존재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면서, 그 해답을 현존재(Dasein)라는 존재자에 대한 분석을 이책을 통해 풀어간다. '존재와 시간'은 존재를 실체나 본질이 아닌, 시간성과 드러남의 장으로 파악하는 철학적 전환을 시도한 작품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인 인간을 통해 존재를 열고, 죽음을 통해 진정성에 도달하며, 존재자가 아닌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철학을 이책에서 수행한다.


존재의 망각과 존재물음의 회복

'존재와 시간'은 다음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존재는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플라톤 이후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자들’(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설명해 왔지만, 정작 그 존재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 즉 존재(Sein)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는 이를 존재의 망각(Seinsvergessenheit)이라 부른다.

이 책은 이 망각된 존재의 문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먼저 존재자 중 자기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 즉 인간(현존재, Dasein)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한다.


현존재(Dasein):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존재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Dasein은 문자 그대로 ‘거기 있음’, 즉 세계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현존재는 세계에 ‘던져져 있음(Geworfenheit)’과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적인 존재이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고정된 본질로 정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있는 존재, 즉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때그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열려 있는 존재 가능성들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로 이해된다.


세계-내-존재와 일상성: 비진정성의 구조

현존재는 항상 세계 속에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의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항상 타인과 관계를 맺고, 도구들을 사용하고, 언어와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성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대체로 ‘그들(das Man)’의 방식으로, 즉 익명적이고 비진정하게 살아간다고 말한다. 우리는 타인이 시키는 대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의미를 따져 묻지 않고 살아가며, 이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잊게 만든다.

비진정성(Unauthenticity)은 현존재가 자기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구조이다.


근본기분과 불안: 존재의 열림으로 이끄는 감응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이성이나 의식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만나는 방식으로서 ‘기분(Stimmung)’, 특히 ‘근본기분(Grundstimmung)’을 강조한다.

그중에서도 ‘불안(Angst)’은 세계의 의미망이 붕괴되고, 존재자들이 모두 물러설 때, 존재 자체가 열리는 정조이다.

불안의 순간에 인간은 외부의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과 죽음을 직면하게 된다. 이는 현존재가 진정성을 회복하는 전환점이 된다.


시간성과 죽음: 존재 이해의 근본 구조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해하려면 시간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시간적인 존재이며, 과거-현재-미래의 흐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 특히 죽음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궁극적 가능성이다. 인간이 죽음을 자각할 때, 그는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존재를 구성하려는 진정성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간성과 죽음의 구조를 통해, 존재란 단순히 고정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드러나고 의미화되는 ‘되어감(becoming)’의 구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7. 트루먼쇼에서 하이데거까지


영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는 하이데거 철학, 특히 존재와 현존재, 탈은폐(Aletheia)와 은폐(Verborgenheit), 비진정성과 진정성, 그리고 기술적 세계(Gestell)의 개념들을 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하이데거적 존재론과 근본기분 개념, 존재자의 세계,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생각보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루먼은 기술적으로 조작된 세계 속에서 비진정한 삶을 살다가, 불안을 통해 존재의 의문을 품고, 마침내 진정성과 존재의 탈은폐를 향해 나아간다. 이 영화는 비진정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존재의 진리를 향해 실존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가능성, 즉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물음(Seinsfrage)의 회복을 보여주는 철학적 우화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본에 모든 사람이 박수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드디어 갖혀진 세트장을 벗어나서 자시만의 세계로 나아가는 트루먼에게 던지는 것이면서 사실은 자기자신에게 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진정성(das Man)의 세계: 트루먼은 ‘그들(das Man)’ 속에 갇혀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이 일상적으로 비진정성의 세계, 즉 ‘그들(das Man)’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는 타인의 기대, 사회의 규범, 문화의 관성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는 삶이다.

트루먼은 태어날 때부터 세트로 조작된 인공 세계인 ‘시헤이븐(Seahaven)’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삶 전체는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리얼리티 쇼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이 제공한 의미 구조와 질서 안에서 비진정하게 살아간다. 트루먼의 모든 관계, 감정, 선택은 이미 스크립트에 따라 설계되어 있으며, 그는 존재자가 드러나는 방식 자체가 조작된 세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는 존재자들—사람들, 도시, 규범들—에 둘러싸여 있으나, 그 존재의 진실에는 전혀 다다르지 못한다.


기술적 존재의 세계(Gestell)_존재자들의 자원화

하이데거 후기 철학에서 기술적 세계관(Gestell)은 존재자들이 자원(resource)으로 환원되는 세계를 가리킨다. 즉, 존재자들은 더 이상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조작, 통제, 효율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트루먼 쇼’의 세계는 철저히 기술적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하늘, 바다, 인간관계, 날씨마저도 연출되고 통제된다. 트루먼은 존재자로서 고유한 드러남의 방식(Zuhandenheit)을 가지지 못하고, 상품화된 삶의 일부로 기능하는 ‘도구화된 존재자’가 된다. 이 세상은 존재자들이 고유하게 열리지 못하고, 존재의 진리가 은폐된 상태로 유지되는 전형적인 기술적 세계이다.

크리스토프라는 디렉터는 이 기술적 세계의 ‘신’처럼 군림하면서, 존재를 조작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했듯, 기술적 세계는 존재 자체를 은폐시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과 마주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불안(Angst)과 존재의 진실로의 전환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을 대표적인 근본기분(Grundstimmung)으로 본다. 불안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의미를 잃고, 존재자가 물러서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는 존재자들에 갇혀 있던 인간이 그 틀을 벗어나, 존재 자체에 깨어나는 실존적 계기이다.

트루먼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하는 순간, 그의 일상은 낯설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갑작스런 불협화음들(라디오 잡음, 세트 벽의 물체 추락, 패턴화된 사람들 등)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진짜가 아님을 암시한다. 이 과정은 바로 불안의 체험이며, 트루먼이 존재자들의 세계로부터 ‘존재’의 물음으로 이행하는 순간이다.

트루먼은 점차적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가 허구임을 깨닫고, 마침내 존재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진정성(Eigentlichkeit)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세계가 던져준 모든 의미(직업, 가족, 친구, 도시)를 거부하고, 자기 가능성을 향한 실존적 결단을 내린다.


존재의 탈은폐(Aletheia): 진정성의 문을 열다

트루먼이 시헤이븐의 끝에 도달해 인공 하늘을 뚫고 나가는 장면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존재의 탈은폐(Aletheia)로 읽을 수 있다.

그 벽 뒤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열린 가능성의 세계, 즉 존재의 진실이 놓인 미지의 세계가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대중의 시선에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존재의 진리를 추구하는 실존적 인간(현존재)이 된다. 이 순간은 존재자가 존재자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의 본래성에 눈을 뜨는 사건(Ereignis)이자, 하이데거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전환의 계기이다.


트루먼의 탈주와 존재론의 변혁: ‘Be’에서 ‘Becoming’으로

트루먼이 시헤이븐이라는 고정된 세계를 떠나는 결정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의 변혁, 즉 ‘존재(be)’에서 ‘되어감(becoming)’으로의 전환과 맞닿아 있다.

시헤이븐은 고정된 구조 속에서 존재자들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세계이다. 하지만 트루먼이 탈주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정해진 존재 방식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향해 미정의 세계로 나아가는 존재, 자기 존재를 시간 속에서 구성해가는 존재가 된다.

이 과정은 고정된 실체나 본질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열림과 드러남의 과정으로서의 존재, 즉 ‘되어감’(becoming)으로 철학이 전환되는 것을 상징한다. 트루먼은 하이데거 철학의 실존적 인간, 존재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현존재의 실례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H7F9vITYmw&t=1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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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길었지만 하이데거 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사실 책을 실제로 읽으면 너무 어려워서 무슨 이야기인지 알기 어렵다. 2차 텍스트를 읽고 다양한 철학서를 읽으면서 하이데거 식의 '존재'를 드러내는 정도를 해본 결과이다. 독일 철학이 가지고 있는 위계 질서와 전제정치의 그늘이 하이데거에게 보이기도 하면서 불안함이라는 근본기분에는 호응하기도 한다. 하이데거를 이해하면 이후에 전개되는 실존주의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이 열리기도 한다. 트루먼쇼를 다시 보면서 어쩌면 나 역시 이 세계 안에서 존재하면서 때로는 갖혀있는 게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요즘들어서 불안과 경이를 왔다갔다하는 시간들이 많은 어쩌면 더욱 존재에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에 조금 더 고민해봐야 겠다. 예전에 고민하면서 정리했던 유신론적 실존주의 그림으로 그리기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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