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주자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어릴 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한 사람에게는 한 가지 저주와 한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저주는 인생에서 좀처럼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과거의 기억이 미래를 덮어 버리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냉소주의에 빠지거나 시간에 자신을 방치하게 된다. 아쉽게도 여기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미래를 갉아먹는 사이에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들도 어느새 할 수 없음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어떤 선물이 주어질까? 그것을 미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쉽게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자신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해 볼 수 있었던 것들은 안정적인 환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니깐 그런 환경이 없으면,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쉽게 도전할 수 없다. 그러나 어려움이 다반사여 던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은 ‘도전’이라고 부르지도 않게 된다. 그냥 하는 것이다.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가 없음으로. 그래서 쉽게 시작하고 쉽게 실패하고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무엇인가를 도전하려고 하는
나의 옷깃을 잡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이러다가 실패한다거나, 영영 돌아올 수 없다거나, 우리에게 피해가 너무 크다거나. 이런 식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 변명‘처럼 들리기 시작할 때. 나는 잠시 멈춰 선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누가 그런 될 만한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가? 그것을 도전이라고 하는가? 머릿속에 계산에서 완벽한 승리가 예견되어 있어서 이제는 시작하자고 하는 사람들의 결말은 결국 아무것도 안 한다가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과거의 어려움이 이럴 때 선물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냥 해보고 어차피 안되더라도 해보는 거지’라는 것. 기대감 없이 시작해 보고 안될 것도 아니깐 다시 해보는 것. 요즘들어 이런 고민을 많이 하다 보니 누군가 내가 말하는 이것을 ’ 기개‘라고 하고 영어로 Grit이라고 했다. 기개라는 것이 무엇인가 능력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인생의 쓴맛을 보고, 어려움 속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 가지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일을 하다 보면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는 데 그 이유를 보니 요즘의 스타트업들은 흔히 말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명성을 날리고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스타트업 이사진에 포진되어야 투자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해한다.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을 찾을 테니깐. 그런데 그런 스타트업들이 투자를 잘 받고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왜 그럴까? 찾아보니 스타트업의 특성상 모든 것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하나 자신이 ’ 직접‘해야 한다. 직접 하려고 하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 실무’의 경험이 쌓여야 한다.
그런데 학벌 좋고 스펙이 어느 정도 우위에 있던 사람들은 스카우트해서 들어가거나 대기업과 같은 시스템이 갖춰진 조직에 들어가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직접‘해볼 기회가 없었고 직접 해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비단 스타트업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이 없이 자란 친구들의 특징은 자신이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곳으로만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기회주의자‘가 되거나 때론 비열해지거나 혹은 비겁해지거나. 모두가 그런 건 아지만 아래에서부터 하나하나 해온 사람의 힘을 너무 무시하는 한국 문화에 대해서 이러한 부분은 곱씹어 볼 만하지 않을까 한다.
https://youtu.be/j32Pi05hRdo?si=aPmN1ix4RaprHVtU
최근 들어 더욱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 분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함께 무엇인가를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나의 인생을 돌아보니 이런 글들이 써지는 것 같다.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어서 하나하나 스스로 인생의 조건들을 만들어 거야 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지치지 않고, 미래를 희망으로 놓되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단순히 배워서 남 준다는 구호 말고, 진실로 도움이 되면서 함께 만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들 투성이다. 요즘 나는 이런 생각으로 하루 종일 생각하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템이나 조직들을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도모하기도 한다. 쉽지는 않지만 머지않아서 그 방법을 찾아내고 알아내고 해보려고 한다.
한여름밤의 꿈이 끝난 듯이 학교 생활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 많이 들었던 말씀이다. "너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어머니는 가난한 시골농부의 장녀로 태어나서 공부해보고 싶었지만 막내이모를 업어서 키우느라 가방끈이 짧아졌었다. 그래서 자녀를 낳으면 꼭 공부를 열심히 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어머니가 못 이룬 꿈 내가 이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책상에 앉아서 죽어라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런저런 분야에 손을 미치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허영과 야망 사이를 왔다 갔다가 하면서 미래의 나 자신을 오늘날의 그림자로 투영해서 버텼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깐 인생에서 성공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나 하나 잘 멀고 잘살자고 공부하는 것은 안 하는 것만 못했다. 그러다가 공부해서 남주자라는 슬로건을 만났다.
그렇게 뒤늦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국제개발 NGO에 취직했다. 6개월 동안 청녀인턴이라는 명목하에 88만 원을 받으면서 버텼다. 노동부에서 6개월을 받았는데 4대 보험을 빼고 보니 정확히 88만 원을 받았다. 노동부 청년인턴으로 회사가 반, 노동부가 반을 나는 제도였다. 그보다 더한 것은 일의 강도였다. 6개월 동안 인턴인데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12시에 집에 왔다. 당시 청담동에 건물이 있었으니깐 방황동에서 1시간 40분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아침저녁을 다녔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후에 이렇게는 못살겠다 생각하고 그만두기를 선택했다. 더욱이 30이 넘어서 들어간 직장에서 인턴이라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88만 원 중에서 점심값이랑 출퇴근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돈을 모으기는 틀렸고, 결혼도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다시 출퇴근길에 책을 잡고 시름했다. 가면서 1시간, 오면서 1시간씩 책을 읽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방식은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한동대학교에서 3달 동안 29세의 나이에 졸업도 못하고 기도실에 처 박혀 있으면서 결단한 것이었다. 3달 동안 금식 아닌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구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무엇을 해 먹고살아야 하냐고. 그래서 내가 대학에 와서 해 본걸 생각해 보니 꽤나 많은 경험을 했더랬다. 해외 아웃리치도 10번 정도 다녀왔고, 생활관 동장도 해보았고, 새내기들 섬기는 위원회도 2년이나 이끌어봤고, 학생회장에도 출마해서 낙방해 보았고. 각종 기도회 인도와 모임을 진행해 왔으니 이 정도의 스펙이면 어디든지 할 말이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영어성적을 만들어서 대기업에 들어갈 꿈을 꾸었다. 나도 이제 복학생에 졸업도 못한 늙은 선배가 아니라 멋져 보이는 자리에서 회사원이 되어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결혼도 하고. 얼마나 좋아? 이런 생각에 들떴다. 취업캠프에서 열심히 기웃거리면서 자소서도 쓰고 이미지메이킹도 하고 인터뷰 준비도 차곡차곡했다. 그리고 3월부터 모집하는 경영직군에 지원하려고 서류를 준비했다. 모든 서류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에 자소서를 손보는데 한 대목에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입사지원 동기’였다. 내가 입사하려고 하는 동기에 대해서 묻는 이 질문 앞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진실로 쓰자면 ‘나도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요 ‘였고 굳이 다듬자면 ’ 세상에 당신의 그룹이 위대한 일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였다. 한동대학교가 ‘명예제도‘라고 해서 거짓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자라는 구호가 유명했다. 나 역시 학부시절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노래를 불렀다. ’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교!‘ 그런데 나에게 유혹 혹은 시험이 찾아온 것이다. 입사지원 동기만 마무리하면 모든 서류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몇 글자를 적다가 ‘에이 말자!’라며 서류를 팽개치고 기도실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3개월 동안 방안에 처 박힌 것처럼 하루에 1끼로 연명하면서 기도를 했다. 당연히 뜨거운 기도는 불가능했다. 그저 신세한탄과 내 인생은 망했다는 결론에 다다른 생각을 불평으로 풀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을 때 비로소 모든 것들을 포기하게 되었다.
가장 내가 먼저 포기해야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이것과 마딱드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절벽 위에 서 있었고, 날개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냥 뛰어내렸다. 앞으로 나의 미래는 모두 미스테리로 남겨놓고, 과거의 히스토리를 믿은체로 말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유‘가 주어졌다. 나의 영혼이 날아다니고, 내가 스스로 만든 철창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왜 공부하는가? 나는 왜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하는가? 나는 왜 사람들과 함께 걷고 싶어하는가? 이런 고민들이 한번에 해결되었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고 3때 찾아온 평안이 다시금 마음 속에 밀려왔다. 그 시간으로 내려와서 바로 자소서를 썼는데 기아대책에 취직하게 되었다. 30분도 걸리지 않은 자기소개서가 오타 투성인데도 받아들여지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
3년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신입직원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눈치보고 실수하고 밤새면서 일하고, 말도 안되는 일들을 버티는 일이었다. 해외훈련을 가는데 2년밖에 안된 신입이 40명을 가르치고 인솔하고 있었으니깐 말이다. 그렇지만 3년이 지나자 이제 슬슬 일도 어느정도 할 수 있고 여유도 생겼다. 물론 일은 줄지 않았다. 그래서 6시에 퇴근해서 철학아카데미에 갔다. 칸트, 헤겔, 라캉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할매순대국에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출근해서 새벽 2시까지 일하다가 퇴근했다. 이렇게 일한지가 5년이 지나자 이제는 철학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일도 손에 잡혔다. 그래서 대학원을 준비했다.
오랜기간동안 내 마음 속에 숨겨두었던 세상을 바꾸고 정치를 통해서 제도를 바꾸는 일 때문에 말이다. 한림대 대학원대학교는 대치동 한가운데 있다.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간 나는 제도론을 배우고, 정치경제학을 배웠다. 정치제도의 친화성을 가진 경제제도와 복지제도를 배웠다. 에스핑엔더슨의 복지자본주의의 3가지 바퀴나 스웨덴 혹은 덴마크의 정치제도 그리고 한국정치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대안들을 배웠다. 너무 기뻤다.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었다. 그 때 당시 ‘정치축제‘를 조그맣게 했는데 많은 정치인들도 만나고 현재 대통령의 강의도 들을 수 있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우수한
성적을 받고 졸업을 했다.
자 이제 무엇인가를 해보자. 그러나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제도를 안다고 그것이 무엇을 바꾸겠는가? 한동안은 허탈해서 공부를 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니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엇이 부족하지 살펴보니 결국은 제도의 성육신은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정책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물론 NGO단체에서 일하고 있으니 돈이 없다. 일을 하면서 다녀야 하니깐 야간으로 다녀야했다. 지금와서 보니 학비로만 1억 5천정도를 쓴 것 같다.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공공정책‘을 전공하면서 수 많은 이론들을 배웠다. 아이큐가 높지 않아서 일반 사람들보다 보통 2배에서 3배정도 공부를 해야 했다. 그때부터 매일매일 밤을 새면서 발표자료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다음카카오에서 브런치가 출시되어서 작가 신청을 했는데 유명하지 않은 시작점이었던 탓에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브런치에 공부한 것을 올린지가 벌써 8년이나 되었다.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모두 올렸다.
중간에 교육학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커리큘럼을 만들어야 하는데, 만들 줄 몰랐으니깐. 그러나 이미 2개의 대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더 다닐수가 없어서 방통대에 편입했다. 2년동안 방통대에서 교육학을 배우며 교수체제설계, 교육철학, 사회복지, 가족교육론, 노인교육론, 원격교육론 등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하는 일도 교육이여서 시너지가 났다. 지금은 그렇게 공부했던 것들을 모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일을 하고 있다. 프레지에서부터 미리캔버스까지 500여개의 강의안을 가지게 되었다. 혼자서 1달동안 매일 강의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매일매일 밤을 새면서 강의안을 만들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나에게 항상 ‘이상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럼에도 ‘배우서 남주자‘라는 신념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리고 이제 어느정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제도와 정책을 배우고 나니 소위 말하는 ’도메인’이 필요했다. 변화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을까? 그러는 사이에 ‘정치스타트업 와글‘하고 전국지자체 플랫폼 연구를 2년동안 진행하면서 전국지자체의 플랫폼을 조사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부구조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박사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교수님들과 연구한 것들을 정치학회에 올리고 연구방법을 배우면서 드디어 연구자의 정체성도 얻게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나혼자만 레벨업‘과 같은 느낌이었다. 매일 4시간씩 밖에 못잤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이렇게 전자정부와 시민참여라는 주제로 연구계획서를 썼고 결국 고려대 과학기술학협동과정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동안 또 매일 매일 안암역으로 왕복 3시간, 일일 평균 4시간을 공부하면서 수료를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말 이렇게 해야하나?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이웃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지난주에야 내 방에 창문형 에어컨이 들어왔다. 인생 40년이 넘도록 더위에 찌들어 살았다. 어릴적 놀림당하던 이유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것이었다. 그래 얼마나 비참하고 인생이 무엇 같은가?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환경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러지?‘ 그럼 당연히 부모님을 원망하게 되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불쌍하다‘라는 이야기를 듣는게 가장 싫었다. 놀라운 것은 나는 아직도 그 영구임대 아파트에 산다. 1.5평의 내 방에서 30년이 넘는 시간을 넘나들었다. 매일 4시간씩 공부하던 곳도, 4시간씩만 잠을 자던 곳도 그 방이었다. 아주 작은 방에서 기도도하고 잠을 자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하고, 웃기도하고 울기도 했다. 그리고 더위에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싶을 때 에어컨이 들어왔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 신항이 없을 때는 운명론에 빠지겠지만 신앙이 생기고 나니 하나님한테 매일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써 내려온 것처럼, 얻었던 지식을 돈을 팔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 NGO에서 직업을 옮기던지 유튜브를 시작하던지, 브런치에 쓴 2800편의 글을 엮어서 책으로 내던지.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매번 나는 나를 부정하면서 이런 공부를 해왔다. 나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자는 다짐으로 4시간씩을 공부했다. 그런데 이제와서?라는 고민들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많은 친구들이 어리석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지식으로 주식도 하고 갭투자도 하고 김창옥 교수처럼 강연도 많이 하는데 너는 뭐냐고 말이다. 나는 사실 그말에 대해서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도 그러고 싶기도하고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다.
그러다가 문득 창 밖에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을 본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독거노인들을 본다. 어렵지만 힘차게 앞으로 걸어가는 옆동 장애인들을 본다. 멀리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넘어온 옆집 탈북청년을 본다. 그 좁은 방에서 아직도 에어컨도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5살짜리 아이들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다. 가족과 떨어져서 가끔씩 담배를 피러 나오는 60살의 아저씨들을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너져내린다. 아니 다시 쌓아올려진다. 내가 공부한 이유는 결국 이것 때문이었다. 결국은 이 가난을 끝장낼려고 이 깊은 곳까지 내려 온 것 같았다. 아니 같았다가 아니라 맞다 그게. 그래서 지금도 기아대책에서 기아와 싸우는 법을 배우고, 공동체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배워서 남주자. 공부해서 남주자. 세상을 바꾸자.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는 내 삶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정치권에서든 교육계에서든 전자정부든 시민참여든. 많은 것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이웃들과 함께 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이 빈곤을 벗어나는 것 말이다. 이 작은 방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흩어지다가 하나의 길로 수렴한다. 많은 이들과 함께 어렵지만 이 경주를 완주하고 하나님 앞에서 울고 불고 웃으면서 기뻐할 날을 기다린다. 다소 흥분하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영구임대아파트 방 한 쪽 구속에서 이 글을 쓴다. 잊지 않겠다. 아니 잊을 수 없다. 누구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주면 좋겠다. 함께 웃고 이야기하면서 미래를 넘어가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게 내가 공부한 이유니깐 말이다. 이렇게 까지 해서 얻은 것들은 모두를 위한 것이니깐 말이다.
https://youtu.be/l5q-5VH4X-E?si=i3FOqEMDvnrzj_h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