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의 그리스도교_종교개혁 개신교 패러다임
한스큉의 그리스도교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스큉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본질' 즉 그리스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 형태는 매번 바뀌었다고 한다. 그것을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하고, 각 시대별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추적한다. 초기 '원 그리스도교 복음'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패러다임을 알아보았고, 이어서 고대교회의 패러다임에서 교부철학을 알아보았고, 중세시대에 로마 카톨릭의 신학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이렇게 역사적인 흐름을 보니 그리스도교가 가진 핵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며 이것이 체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직제화'되는 교회와 성당의 흐름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는 극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중세 이후 종교개혁 패러다임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이전에 다룬 패러다임은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이었다. 중세 가톨릭 패러다임은 교황과 제도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이 시기 그리스도교는 교황이 영적 권위와 더불어 세속 권력까지 장악하며 교회의 권위가 극대화되었다. 교회의 전통과 성직자 계급이 신앙의 핵심을 이루었고, 성서보다 교황의 교서나 공의회 결정이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구원은 주로 성사(성례전)를 통해, 그리고 선행과 공로를 쌓는 행위를 통해 얻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중세 패러다임은 교회 중심, 성직자 중심의 왜곡된 형태로, 한스 큉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 의도했던 것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비판한다.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종교개혁 패러다임은 중세 패러다임에 대한 급진적인 개혁과 반발로 나타났다. 이는 그리스도 중심, 성서 중심, 은혜와 믿음 중심, 만인 제사장직을 핵심으로 한다.
이 패러다임은 교회의 제도와 권위보다 개인의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인간의 구원은 어떠한 인간의 행위나 중재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려 했다.
한스 큉은 이 시기의 패러다임을 그리스도교가 다시금 그 근원적인 본질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평가한다.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
종교개혁 이후 근대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리스도교는 또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한다. 이 시기에는 이성과 합리성, 과학적 진보가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등장했다.
전통적인 신학과 교리는 과학적 발견과 철학적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종교적 권위는 약화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가속화되고, 종교의 자유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스 큉의 평가
한스 큉은 종교개혁 패러다임이 중세 패러다임의 왜곡을 바로잡고,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루터 사후 발생한 '종파화' 과정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의 이상이 또 다른 교리적 분열과 대립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근대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고 본다. 큉에게 종교개혁은 과거의 왜곡을 극복하고 본질로 돌아가려 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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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자,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믿음이다. 이는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성직자, 성인, 성모 마리아 등이 구원의 통로 역할을 했던 것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의 교서나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중세 시대에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지상의 최고 권위를 가졌고, 성직자들의 중재를 통해서만 성례전(세례, 성찬 등)에 참여하거나 죄를 고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교회의 반석이라고 주장했다.
중세 시대에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싶다면, 교회에 가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가 정해준 벌칙(예: 특정 기도문 암송, 선행)을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주의 관점에서는 이 과정이 불필요하다. 즉,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중재 없이 직접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써 용서를 구할 수 있다. 이는 마치 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에게 민원을 제출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중간에 한마디로 '마진'을 챙기던 사제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종교개혁에서 그리스도교는 교회 중심의 중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시도와 그로 인한 분열이라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것의 시작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중세시대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등장하던 시기에 일어나던 일이다.
종교개혁의 특징
중세 가톨릭교회로부터의 분리 :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 면죄부 판매, 성직자들의 세속화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의 권위보다 성서의 권위를 우선시하고,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서유럽 그리스도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프로테스탄트)**라는 두 개의 주요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복음의 본질 회복 시도 :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졌던 복음의 핵심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는 성서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개신교는 교황과 성직자 중심의 계층 구조를 거부하고, **'만인 제사장직'**을 강조하며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는 신앙의 주체를 개인에게로 돌려놓는 중요한 변화였다.
근대 사회의 형성에 기여 :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 사회의 기초를 놓는 데 기여했다. 종교의 자유와 개인의 양심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성서 번역을 통한 문해력 향상은 대중 교육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적이고 근면한 직업 윤리는 자본주의의 발달과도 연결된다고 보기도 한다.
성서 중심주의는 오직 성서만이 신앙과 신학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권위라는 원리다. 이는 중세 교회가 성서와 함께 교회의 오랜 전통, 교황의 교서, 공의회의 결정 등을 동등한 권위로 여겼던 것에 대한 반발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나 교회의 전통이 성서의 가르침과 상충될 때, 오직 성서의 가르침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했다. 종교개혁 이전, 성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 대부분의 일반 신자들은 읽을 수 없었고, 성직자들의 해석에 의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신자가 직접 성서를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는 인쇄술의 발달과 맞물려 일반 대중에게 성서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신자들은 교회의 해석이 아닌, 성서를 통해 직접 신앙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와 신부만이 성서의 '공식 해설가' 역할을 했다. 일반 신자는 신부가 전해주는 내용을 그대로 믿어야 했다. 하지만 종교개혁 후에는 모든 신자가 직접 성서를 읽고, 그 내용을 각자의 양심과 믿음에 따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마치 학교에서 교과서를 교사가 직접 읽고 해석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이 교과서를 직접 읽고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하도록 권장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한스 큉은 성서중심주의를 중세의 왜곡을 바로잡은 혁명적인 원리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문자주의와 종파주의라는 새로운 문제점을 낳았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성서중심주의의 긍정적 평가
복음의 본질 회복: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서와 함께 교황의 교서, 공의회의 결정, 교회의 전통을 동등한 권위로 여겼다. 그러나 큉은 이러한 요소들이 때로는 성서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압도했다고 지적한다. 성서중심주의는 이러한 부가적인 권위들을 배제하고, 오직 성서만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규범임을 선언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개인 신앙의 주체성 강화: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서가 라틴어로만 존재해 일반 신자들이 직접 읽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직자들의 해석에만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각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고 인쇄술의 발달로 보급되면서, 모든 신자가 교회의 중재 없이 직접 성서를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신앙의 주체를 개인에게로 돌리는 중요한 변화였다.
성서중심주의의 한계와 비판적 시각
'성서 문자주의'의 위험: 성서를 문자 그대로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성서가 쓰여진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무시하고 근본주의적이고 경직된 해석을 낳는 부작용이 생겼다. 큉은 이는 성서의 본질인 '살아 있는 말씀'을 '죽은 문자'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교리적 분열의 원인: '오직 성서' 원리가 각 개혁자의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되면서, 성찬식이나 유아세례 등 주요 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심화되었다. 이는 결국 개신교가 수많은 종파로 분열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큉은 성서중심주의가 '하나의 교회'라는 본래의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분열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오직은혜와 오직 믿음이라는 원리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 교회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선행, 성사, 금식, 순례, 그리고 면죄부 판매 등을 강조했던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마르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의 구절을 통해 이 원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인간의 죄를 씻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인간에 대한 자유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반한 선택과 행동에 대한 중요성이 드러난다. 이후 복음주의권으로 넘어가면 이러한 주장은 교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방식의 '믿음의 방정식'이 만들어진다.
중세 교회는 '공로의 보물' 개념을 통해 성자들의 남는 공로를 교회가 보관하고, 이를 면죄부 판매를 통해 신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구원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이 성서에 없으며,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의 선한 행위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발적으로 행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친구가 당신을 위해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그 선물을 받는 데 어떤 노력을 했거나 돈을 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친구의 사랑과 호의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오직 은혜'는 이와 같다. 구원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혜)의 선물이며, 우리는 그 선물을 믿음이라는 손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
만인 제사장직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으로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교리다. 이는 성직자(신부, 주교 등)만이 일반 신자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할 수 있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제사장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제사장만이 성찬식을 집례하거나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졌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는 구절을 근거로 모든 신자가 영적인 의미에서 제사장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영적 권위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모든 신자는 자신의 신앙과 삶에 대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하며, 다른 신자를 영적으로 도울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중세 시대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려면 신부님을 통해야만 했다. 마치 오직 특정 대변인(성직자)만을 통해서만 지도자(하나님)에게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는 누구나 언제든지, 어떤 장소에서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마치 모든 국민이 대통령 직통 핫라인을 통해 직접 민원을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인제사장 주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카톨릭'에 대한 반발로 '개인주의'가 만인제사장주의에서 주장되었다는 것은 결국 정치시스템에서 '1인 1표제'가 성립될 것이라는 효과를 예정했다. 그리고 이어서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을 통해서 실제로 민주주의는 만인제사장직에 의해서 발전했다.
한스 큉은 종교개혁을 기독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본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가 인간의 제도를 통해 구원을 상품화하고 권력을 축적했던 비복음적인 행태에 대한 근본적인 반발이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했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원리가 중세의 '공로 신학'을 깨뜨리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임을 재확인했다고 평가한다. 이로써 인간의 노력이나 교회의 중재 없이 그리스도와 개인의 직접적인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스 큉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독교가 자신의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용감한 시도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큉은 종교개혁의 한계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는 종교개혁이 교회의 일치라는 예수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루터와 칼뱅 등 개혁자들 간의 신학적 이견은 결국 프로테스탄트 내에서도 수많은 교파를 탄생시켰고,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를 영구적으로 분열시켰다. 큉은 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을 '고착화된 교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교리적 권위에서 벗어났지만, 각 개신교 교파가 자신들의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고수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교리적 독점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종파주의(Confessionalism)'라고 부르며, 종교개혁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또 다른 율법과 교조주의의 굴레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큉에게 종교개혁 패러다임은 완결된 체제가 아니라,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단계였다. 종교개혁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성과 과학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도전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중세의 신학적 사유 방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했을 뿐, 미래의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졌다고 큉은 평가한다. 이러한 큉의 분석은 종교개혁을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 요약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 교리를 주장하며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다. 그는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오직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라는 성서무오설(Sola Scriptura)을 강조하며 교황과 교회 전통의 권위에 도전했다.
장 칼뱅 (John Calvin) : 칼뱅은 루터의 주장을 체계화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의 핵심 교리는 예정설(Predestination)로, 구원받을 자와 멸망할 자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의 철저한 해석을 통해 신앙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금욕적이고 근면한 직업 윤리로 이어져 자본주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 :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퍼킨스는 칼뱅의 신학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양심의 신학'을 강조하며, 신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개인의 삶에 적용해 구원의 확신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학은 개인의 성화와 도덕적 삶을 중요시하며, 영국 청교도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조너선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의지는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의 설교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강렬하게 묘사하여 회개와 부흥을 이끌었으며, 정서적인 체험이 동반된 진정한 신앙을 강조하였다.
존 번연 (John Bunyan) : 번연은 신학자가 아닌 침례교 설교자이자 작가로, '순례자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인 순례길로 묘사하며, 신앙의 여정에서 겪는 고난과 유혹을 극복하고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강조했다. 그의 저서 '천로역정'은 그리스도인이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매슈 헨리 (Matthew Henry) : 헨리는 영국 비국교도 목사이자 주석가로, 성경 전체에 대한 실천적이고 경건한 주해로 유명하다. 그는 성경의 각 구절을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과 신앙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주해는 깊이 있는 신학적 논의보다는 성경을 통해 교훈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스큉은 종교개혁은 초기 그리스도교 중요시 했던 핵심가치로 돌아가고자하는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롭게 치고 들어오는 계몽주의 패러다임은 개혁이 완성되기도 전에 새로운 변화를 맞닥드리면서 완성도가 떨어지게 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개신교는 여기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면서 기존의 로마카톨릭이 놓치고 있던 그리스도가 가진 가치를 회복한다. 그러면 개신교가 했던 모든 것들이 원재의 합당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죄악은 매번 개혁을 필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교회들은 타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스큉이 보기에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뿐! 그럼 어떻게 계몽주의를 맞이했는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자.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
이 패러다임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반영하며, 종교개혁과는 또 다른 형태의 도전과 변화를 가져왔다.
이성과 합리성의 부상: 계몽주의 시대에는 전통적인 종교적 계시나 교회의 권위보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사조가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의 신학은 과학적 발견과 철학적 비판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과학 혁명과의 갈등: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의 발견은 중세 이래로 유지되어 온 천동설과 같은 전통적인 우주관을 흔들었다. 이로 인해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고, 신앙과 과학의 관계는 첨예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교회 권위의 약화: 국가와 사회가 점차 세속화되면서,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권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종교의 자유와 개인의 양심이 강조되면서, 신앙은 개인의 내면적 영역으로 한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한스 큉은 이 시기를 기독교가 이성과 진보라는 새로운 신념 체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시 찾아야 하는 위기이자 기회의 시점으로 본다.
종교개혁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제도적 문제에 대한 내부적인 개혁이었다면, 근대 계몽주의는 외부의 이성적, 과학적 비판에 직면하여 신앙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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