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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국가가 구세주라는 신화

윌리엄 캐버너_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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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어떻게 구세주가 되었을까?


근대의 발명품인 근대국가의 탄생은 '상상력'의 결집이었다. 최근에 회자되는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정치세력은 사실은 하나의 '증상'이다. 상상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더 이상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럴 때 낡아빠진 구닥다리 이미지를 붙잡고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수구세력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아직도 그 이미지에서 얻어먹을 게 많기 때문이다. 중세를 지나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발명된 근대국가는 이전 세기가 가지고 있던 권위의 상징은 '종교'의 왕관을 쓰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종교에서의 구원이 정치에서는 국가가 되었다. 심지어 오늘날 손바닥에 '왕'이라고 쓰고 토론회에 나오는 이들까지 생겼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구세주라는 '슈퍼맨 신드롬'이 근대를 온통 휘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태극기나 성조기, 심지어 일장기를 쥐고 흔들어대는 사람들은 여전이 '구세주'라고 믿는 국가의 대표가 '왕'이길 바라는 신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국가가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는 구원론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학자가 바로 윌리엄 캐버너이다. 보통 카바노프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캐버너는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신학을 했고 케임브리짓에서 급진적 방법론을 공부한다. 더 나아가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스탠리하우어워스에게서 사사받으면서 1966년 종교학박사학위를 받는다. 한국에서는 '정치신학 연구'나 '인간타락과 진화'라던지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와 같은 책이 소개되었지만 세계적으로는 고문과 성찬례(1998), 종교성의 폭력(2009), 야전병원(2016)과 같은 명작들이 출판되었다. 신학스터디를 하면서 우연하게 알게 되었지만 윌리엄 캐버너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관이 너무 좁게 느껴진다는 놀라움을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게 된다. 오늘은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다음 글들에서 연재할 사회계약과 종교,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을 만들어내는 종교와 국가 등등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윌리엄 캐버너

윌리엄 캐버너(William Cavanaugh)는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정치 신학자로, 종교와 정치, 경제, 국가 간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주력하는 학자이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는 과정과 그 배경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진행하며, 종교 폭력과 국가 폭력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종교 폭력의 신화(The Myth of Religious Violence)’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사회에서 종교를 폭력과 결부시키는 담론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해 왔다고 주장한다. 세속 국가가 종교적 폭력을 억제하는 중립적인 존재라는 통념을 비판하며, 오히려 국가 자체가 일종의 종교적 구조를 띠고 있으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의 저서 《The Myth of Religious Violence》는 서구에서 종교를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어떻게 근대 국가의 정당성을 구축하는 데 이용되었는지를 분석하며, 종교와 세속의 이분법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개념임을 논증한다. 《Migrations of the Holy》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거룩함'의 개념이 국가와 시장으로 이동하는 방식과 그 결과를 탐구하며, 《Being Consumed》에서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가 어떻게 현대인의 신앙과 삶을 변화시키는지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는 또한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와 시장의 영향력 아래에서 교회가 어떻게 저항적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시’ 개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단순한 중립적 행위자가 아니라 일종의 ‘경쟁하는 교회’로 간주하며, 이에 대응하는 교회의 실천을 강조한다.

캐버너는 현재 미국 드폴 대학교(DePaul University)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그의 연구는 현대 정치 신학, 기독교 윤리, 경제 신학 등의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The Myth of Religious Violence, 2009_종교 폭력의 신화

서구에서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며, 세속적 국가가 이를 억제한다고 믿는 '종교 폭력의 신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와 세속의 이분법은 근대 국가 형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며, 역사적으로 정치적 폭력과 종교적 폭력을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이다.

오히려 근대 국가는 종교를 폭력의 원인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한다.

국가 자체가 새로운 ‘대체 종교’로 작동하며, 시민의 충성과 희생을 요구한다.

결론: 국가가 종교보다 본질적으로 평화롭다는 통념은 허구이며, 교회는 국가의 폭력적 구조에 저항하는 대안적 공동체로 역할해야 한다.


Migrations of the Holy,2011_거룩함의 이동

‘거룩함(the holy)’이 더 이상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와 시장으로 이동했다.

과거 종교가 차지했던 사회적·도덕적 권위를 국가와 시장이 흡수하면서, 이들이 거룩함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는 전쟁과 충성을 통해 신성한 가치를 주장하고, 자본주의 시장은 소비를 통해 만족과 의미를 제공하는 대체 종교가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교회는 국가와 시장의 지배적 담론을 비판하며, 대안적 거룩함의 질서를 제시해야 한다.

결론: 신자들은 단순히 국가와 시장에 종속되지 않고, 성찬과 공동체적 삶을 통해 새로운 경제와 정치 질서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Being Consumed,2008_소비됨

현대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조직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소비주의는 단순한 필요 충족이 아니라 끝없는 갈망을 조장하며, 사람들은 소비하면서도 스스로 소비된다(Being Consumed).

자유 시장경제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보장한다는 신화는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를 은폐한다.

자본주의적 소비에 대한 대안으로 성례전적 경제(sacramental economy)를 제안하며, 성찬(Eucharist)의 공동체적 의미를 강조한다.

결론: 시장이 개인적 욕망을 조장하는 반면, 교회는 연대와 상호 돌봄을 실천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Torture and Eucharist,1998_고문과 성찬

칠레 독재정권(피노체트 정권)의 고문 사례를 분석하며, 국가가 폭력을 통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는 방식을 탐구.

국가 폭력은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신체를 해체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과 공포를 주입하는 종교적 의례처럼 작동한다.

이에 맞서 교회는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몸(공동체)을 재건하는 대안적 실천을 제시해야 한다.

결론: 성찬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가 폭력에 맞서 공동체적 연대를 형성하는 정치적·신학적 저항 행위이다.


Field Hospital: The Church’s Engagement with a Wounded World,2016_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기존의 제도적 역할을 넘어 ‘야전병원(field hospital)’처럼 상처받은 세상을 치유해야 한다.

교회는 단순한 윤리적 설교를 넘어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실천을 강조해야 한다.

교회의 역할은 단순한 도덕적 권위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고, 고통을 나누는 데 있다.

결론: 교회는 폐쇄적 기관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사랑과 치유를 실천하는 개방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1. 국가가 구세주라는 신화


정치는 상상력의 결합물이다. 베네딕트 엔더슨이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에서 밝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시물라르크'라는 허상을 실제하는 것으로 믿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정치의 결과로 군대, 기업, 국가, 사회, 공동체라는 상상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되었다. 캐버너는 이러한 정치의 속성의 결과로 '고체' 처럼 단단한 조직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농촌에서 농사짓고 있던 소년이 세계의 반대쪽에 있는 전쟁터로 가서 다른 나라의 소년들을 죽이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소년이 행동이 가능하려면 자신과 자신이 죽인 소년이 다른 나라의 다른 인종의 다른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러한 존재들이 자신을 위협하거나 자신이 믿는 국가에게 위험을 가하는 존재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우발적인 역사적 경로를 가진다. '고체'라는 것이 사실은 혼합물이다.


국가는 구성요소가 없이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국가의 구성요소라고 불리는 국가와 연결된 시민사회와 국가의 문이 열려져서 세계와 소통하게 되는 '세계화'는 서로 자유시장경제의 논리처럼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혼합물인 '고체'덩어리 국가의 구성요소들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연결된 상상력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국가의 요소 중에 교육, 사회, 군사, 외교, 정치는 모두 상상력의 결합이다. 실제 존재하는 물체가 있는 것들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묶음을 통해서 만들어 놓은 '상상적 결집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러한 국가에 대해서 '애국심'을 느끼고, 그 애국심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죽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인간들이 탄생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근대국가 형성기에서 드러난 국가형성의 방식은 이전의 중세시대가 가지고 있던 신학에서의 '구원론'을 차용했다. 중세시대에는 '구원론'의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이 우리를 지켜주던 시절에 다양한 생각들을 하나의 상상력으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을 모방하여 신의 자리에 '국가'라는 개념을 대체해서 사용했다. 국가가 아니라 교회였으며, 대통령이 아니라 교황이었고, 공무원이 아니라 사제들이 구원의 통로에 있었다. 그러나 '신의 죽음'에 따라서 근대국가는 새로운 '신'을 필요로 했고, 신의 몸을 본떠서 국가를 만들고 그 머리에 '왕'이나 '군주' 혹은 '대통령'이나 '총리'를 앉혔다.


홉스에 의하면 국가는 '국민들의 모임'이면서 바운더리가 있는 통치체이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는 '구원자 혹은 구세주'가 되며, 국가의 질서와 법에 순종하는 것은 신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제공했다. 국가가 구세주가 되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며, 가족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국가라는 구세주에게 목숨을 바치며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지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가 사회계약의 당사자인 시민들에게 봉사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는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 때도 합법적인 선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국가가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루소나 홉스를 통해서 본 근대 국가는 자연과 인간본성, 인간 갈등의 기원, 국가자체의 구현을 통한 갈등해결과 같은 특정한 이야기적 상상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이전까지의 세계관이었던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세계관은 인류를 괴롭히는 분열들로 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근대국가는 중세 교회론이 제시한 '신'의 개념을 이어 받아서 자신들이 새로운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국가가 곧 신이고, 신의 대리인인 대통령이나 총리가 구원자의 상징을 가져가는 것이다. 두 구원론 모두 사회적 신체를 빚어냄으로써 평화와 분열의 종식을 추구한다. 국가라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복제품이며, 이것을 윌리엄 캐버너는 시뮬라크룸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근대 이후에 국가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조직이 된다.



국가가 구세주라는 신화 (The Myth of the State as Savior)

이 신화는 국가가 사회의 모든 문제, 즉 경제적 불평등, 범죄, 실업, 질병 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하고 궁극적인 주체라는 믿음이다. 현대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시스템, 군사력, 법률 등에 의존하며, 마치 국가가 '신'처럼 모든 것을 책임지고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캐버너는 이러한 기대가 결국 국가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시민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한다.

국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시민들의 삶과 인격을 지배하려는 위험한 경향을 보인다.

캐버너에게 국가는 단순한 통치 기구가 아니라, 구원의 약속을 통해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존재이다. 국가는 복지, 안전, 질서 등을 제공하며 시민들의 삶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려 한다.

이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국가에 대한 숭배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캐버너는 이러한 국가의 우상화에 맞서, 교회가 국가의 폭력과 거짓된 약속을 폭로하고 저항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 국가의 신화

복지 국가는 시민의 삶을 보장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구원자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실업 급여, 의료 보험, 주택 보조금 등은 시민들에게 물질적 안정과 심리적 위안을 제공한다.

하지만 캐버너의 관점에서, 이것은 국가가 시민의 삶을 전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시민들은 국가의 혜택에 의존하며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기보다, 국가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존재가 되기 쉽다.


국가 안보의 신화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생각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신화 중 하나이다. 국가는 군대와 경찰력을 통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내부의 질서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가는 때때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수단들을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하에 개인의 사생활이 감시되거나, 소수 민족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2. 시민사회가 자유공간이라는 신화


흔히 시민사회는 국가의 권력과 시장의 자본주의적 논리로부터 벗어난,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인식된다. 비영리단체, 동호회, 시민 운동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캐버너는 이러한 시민사회가 실제로는 국가의 통제 아래 놓이거나, 시장의 효율성과 경쟁 논리에 오염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시민사회 단체들이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거나, 기업의 후원을 받기 위해 그들의 이념에 맞춰 활동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캐버너는 시민사회를 국가와 시장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으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 반대한다. 그는 시민사회가 종종 시장의 자본주의적 논리나 국가의 통제에 종속되어 그 순수성을 잃는다고 본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제도나 논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바탕으로 하는 구체적인 공동체적 실천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실천적 공동체의 모델이 되어야 하며, 이는 시민사회가 상실한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NGO의 상업화

환경 보호 단체(NGO)가 기업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면서, 그 기업의 환경 파괴적인 활동에 대해 침묵하거나 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NGO는 본래의 목표인 '환경 보호'를 추구하기보다 '지속적인 운영'이라는 상업적 논리에 갇히게 된다. 이는 시민사회가 순수한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시장의 논리에 종속된 영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 운동의 제도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작된 사회 운동이 점차 규모가 커지고 조직화되면서,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인가를 받거나 보조금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운동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춰 그 성격이 변질되거나, 급진적인 목소리가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즉, 운동의 본래적인 자유로움과 비판적 역량은 상실되고, 국가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되어버리는 것이다.



3. 세계화가 보편이라는 신화


세계화는 국경을 넘어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고, 보편적인 가치와 문화가 확산되는 긍정적인 과정으로 인식된다. 전 세계적인 정보 교류, 문화적 다양성 확대, 경제적 풍요 등이 그 예시이다. 그러나 캐버너는 이러한 세계화가 사실은 서구의 자본주의와 특정 문화가 전 세계에 강요되는 과정이라고 비판한다. 즉, 세계화는 진정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중심의 단일한 체제와 가치를 강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캐버너는 세계화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가치를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서구 자본주의라는 특정 문화가 전 세계에 강요하는 '거짓된 보편성'으로 규정한다. 그는 세계화가 진정한 다양성을 해치고, 특정 권력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작용한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캐버너는 교회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다양한 문화와 공동체를 포용하는 '진정한 보편성'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교회가 지역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다른 세상의 질서를 보여주는 실천적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세계화의 획일성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의 확산

세계화의 상징인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전 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동일한 메뉴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보편적인 '편리함'과 '현대성'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각 지역의 고유한 식문화와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파괴한다.

즉,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체제는 사실상 서구 자본주의 문화가 비서구 지역의 다양성을 흡수하고 지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미디어의 지배

소수의 거대 미디어 기업(예: 디즈니, 넷플릭스)이 전 세계의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현상도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특정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기보다, 전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서사와 가치관을 주입한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문화는 점점 더 획일화되고, 다양한 문화적 목소리는 소외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4.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러한 논의를 구조화해보자. 시민사회는 물질과 가까운 층위에 두고, 국가는 정신과 가까은 층위에 두고 서로가 중심에서 만나는 지점을 상상해보자. 국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의 상상력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이것은 장 보르리야르가 말한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정신속의 구조화된 건물인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물라르크를 형성하는 방법은 다양한 방식이 있으나 근대국가 형성에서 헤겔은 변증법을 사용하여 국가, 사회, 가족을 묶을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실재계에 존재하는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이 그룹핑되어 있는 방식은 행위, 작업, 노동이었다.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은 언제나 존재하는 플랫폼이 된다. 인간은 플랫폼이다. 역시나 국가, 사회, 가족은 플랫폼에서도 상상력의 플랫폼이다. 이러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인식론적 결정론에 기인한다. 이런 방식으로 상상력을 통해서 구현한 고체들을 다시 상상력을 통해 만든 플랫폼 안에 구성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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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윌리엄 캐버너가 주장하는 국가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특별히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시민사회는 교회라는 커다란 공동체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중세시대를 지나오면서 교회법 전통의 세계관이 계몽주의 이후에 사회계약론으로 계수된다. 사회계약론은 국가론의 일종이다. 국가를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에 대해서 국가의 주인이 없어진 상태에서 주인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고안해 내야 했다. 그래서 국가라는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 '일반의지'를 대변하는 대표를 만들고, 시민사회라는 신화를 만들어서 공동체가 담당했던 구성원에 대한 사랑과 존경, 배려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했다. 윌리엄캐버너의 카톨릭신학자 답게 세계화에 대해서도 거짓된 보편성으로 구분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교회를 통한 전세계적인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오늘은 이렇게 정치신학의 한 장면에서 윌리엄 캐버너의 신학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점점 더 국가론에 대한 고민을 더 해야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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