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융프라우

by 미노칼럼


"그럼 세네시 즈음 보자."


약속 시간 잡는 꼬라지에서 이 친구의 'P' 성향을 알아봤어야 했다. 식당에 앉자마자 오늘 몇 시에 들어가야 되냐는 내 질문은, 이 친구에겐 숨통을 조여 오는 손아귀였을지 모른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며 시간이 지나가다, 툭 하고 시간이 멈췄던 순간이 있었다. 서로의 여행 이야기가 나온 순간, 우리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시간은 그 중간에서 눈치를 보는 듯했다. 다시금 초침은 본인 갈 길을 갔고, 아니 오히려 '너네들 잘 싸워봐라'며 이전보다 두 배로 빨리 달렸다.


스위스 3박 4일 여행 중에, 융프라우 라이브캠에 구름이 많이 낀 걸 보자마자 안 올라갔다는 친구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게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융프라우행 기차 티켓은 끊어져 있었을 것이기에 안 올라간다는 선택지는 이미 내게 없고, 혹여나 안 간다 하더라도 그럼 그날은 다음날 하려 했던 계획을 당겨야 되는데 그게 가능한지 확인도 안 해보고 그냥 안 올라간다고? 이해가 안 돼 던지는 질문과 함께 이 친구를 향한 애정과 우정만큼이나 진한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래서 넌 날씨 좋은 융프라우 봤어? 난 다음날 라이브캠에 구름 한 점 없는 거 보자마자 올라가서 봤어!" 실제로 난 못 봤다. 그래서 할 말이 없었다.


내 친구의 '무계획' 성향은 어쩌면 '만능계획' 성향이었나 보다. 언제 어떤 순간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고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사람. 어쩌면 '계획'이라는 이름의 감옥과 한계에 나 스스로를 가둔 건 아닐까 돌아보았다. 결국 난, 융프라우 정상에서 신라면만 먹고 내려왔었기 때문에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PS. 헤어지며 "다음 주에 봐." 라는 친구의 인사에, "우리 약속 다음 주가 아니라 다다음 주야."라고 정정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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